징용피해자 손배 소송 ‘각하’…대법 판례 뒤집은 하급심

유설희·전현진 기자

재판부 “개인청구권 소멸·포기 아니지만 소송 행사는 제한”

대법 판결 당시 소수의견과 동일…피해자 구제안 언급 없어

민변 “국가적 이익 앞세워 피해자 권리 불능으로 판단” 비판

<b>눈 질끈</b>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씨(왼쪽)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장이 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16개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소송 각하판결을 받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눈 질끈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씨(왼쪽)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장이 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16개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소송 각하판결을 받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1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피해자들에게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봤다. 이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따르지 않은 이례적 판결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는 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씨 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16개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각 1억원을 배상하라며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끝내는 것이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개인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했다.

이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상반된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제철이 이씨 등에게 각 1억원씩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수의견(7명의 대법관)은 한일청구권협정은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합의일 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청구권협정만으로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또는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권리는 제한된다’는 반대의견을 밝혔다. 청구권협정에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에 이르는 방식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돼 있는데, 이 문언을 해석하면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권리는 제한된다는 취지다. 이날 재판부는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밝혔다.

하급심 판결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을 따르는 것이 위법한 것은 아니지만 극히 이례적이다. 법원조직법 제8조는 ‘상급법원 재판에서의 판단은 해당 사건에 관해 하급심을 기속한다’고 규정한다. 쟁점은 같지만 앞선 이춘식씨 등의 손배소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므로 대법원 판례를 따를 필요는 없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이렇게 판단하지 않고서는 판사로서의 양심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신에 따라 이날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판결 내용을 두고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에 대한 판단을 누락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면 피해자들은 대체 어디에 위자료를 청구하라는 것이냐. 이에 대한 심리가 미진하다”며 “개인청구권이 소멸됐으니 국가가 일본 대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라고 기각 판결을 내리든 명확한 결론을 내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의견도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권리구제 방안을 언급했다. 이날 판결문에 그런 언급은 없다.

이날 재판부는 이 사건이 향후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게 될 경우를 상정해 국가와 사법부가 입게 될 여러 손해들에 대해 판결문에 상세히 언급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만약 국제재판소에서 패소하는 경우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은 바닥에 추락하며, 여전히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여있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미합중국과의 관계훼손으로 이어져 헌법상의 ‘안전보장’을 훼손하고 사법신뢰의 추락으로 헌법상의 ‘질서유지’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의 절차적 흠결도 논란이 됐다. 재판부는 추가 변론이 필요하다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고기일을 잡았다. 재판부는 또 당초 오는 10일로 예정됐던 선고기일을 이날로 앞당겼다. 재판부는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판결 선고기일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당사자,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소신 판결을 내리려고 했다면 비판도 감수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판결 직후 원고들이 항소할 의사를 밝힘에 따라 항소심 결과가 주목된다. 만약 항소심에서도 같은 판단이 나올 경우 대법원이 최종 판단하게 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이날 논평을 내고 “국가적 이익을 앞세워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불능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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