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폭탄’ 그 후

“반지하 ‘수해 위험’ 피해서 나가봤자…갈 곳은 ‘화재 위험’ 고시원뿐”

이홍근 기자

서울시 ‘퇴출’ 정책에 싸늘한 청년들 “실효성 없다” 입 모아

“곰팡이 피어도 어쩔 수 있나요. 월세가 20만원 넘게 차이 나니까 반지하로 간 거죠.”

서울 용산구에 거주 중인 사회초년생 박실씨(27)는 2년 전까지 반지하에 살았다. 박씨는 당시를 ‘곰팡이와의 전쟁’으로 기억했다. 습기가 차 꿉꿉한 박씨의 방은 자주 곰팡이 냄새로 덮였는데, 여름이 되면 방 안에 널어놓은 빨래에까지 곰팡이가 피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박씨의 방은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창문을 닫아놓아도 어느 틈엔가 미세먼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량으로 인한 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가 봐도 살아가기에 악조건이지만 이걸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박씨가 반지하를 선택한 건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기숙사에서 살 수 없어 자취를 하게 됐다”며 “인턴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순 없었는데, 가진 예산으로 서울에 남으려면 반지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4월부터 서울 동대문구 자취방에서 생활 중인 최휘주씨(26·동국대 4학년)도 마찬가지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은 고시원 아니면 반지하였다. “벌레가 끓는 고시원보단 습기 찬 반지하를 택했다”는 최씨는 “이 예산에 살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은 서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10일 앞으로 반지하와 지하 주택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폭우로 물이 들어차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일가족 3명이 지난 9일 숨진 채 발견된 직후 내놓은 대책이었다. 서울시는 기존 반지하 주택은 10~20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순차적으로 없애겠다고 했다. 반지하를 비주거용으로 전환하면 건물주에게 리모델링을 지원하거나 정비사업을 추진할 때 용적률 혜택을 주는 방안 등이 준비 중이다.

반지하에 살아 본 사람들은 이 같은 서울시의 ‘반지하 퇴출’ 정책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당장 반지하라는 ‘선택지’가 막히게 되면 다른 열악한 주거형태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더 오를 것이라고 봤다. 특히 서울에 있는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20대들은 “반지하 외에 비슷한 돈으로 고를 수 있는 주거지는 옥탑방 아니면 고시원뿐”이라면서, “그나마 싸다는 옥탑방·고시원도 이제 더 비싸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서울의 지하·반지하 거주 가구가 20만여가구에 이르는데, 이를 단기간에 다른 주거형태로 수용하려다 보면 ‘풍선효과’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 지하·반지하 거주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주택 입주 지원 자격 혹은 주거 바우처 등을 대폭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반지하 거주자 또는 경험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박씨는 “임대주택을 신청하려고도 해봤는데, 고향 어머니 집이 내 명의로 되어 있어 원천적으로 신청이 불가능했다”며 “이런 사각지대가 많을 텐데 전부 고려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침수 등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반지하 거주자가 고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고시원이다. 황모씨(26)는 “고시원은 또 다른 안전 사각지대”라며 “겨울철마다 화재로 인한 사망사고가 꾸준히 나온 위험 거주시설”이라고 했다.

“긴급 상황인데 긴급 대책은 없는 것 같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비 예보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반지하 생활자’ 최씨는 “비가 온다면 신림동 일가족 사망 사건 같은 사건이 또 발생할 것”이라며 “건물주를 지원하는 방안이 아니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올 수 있게끔 지원하는 방안부터 먼저 나왔어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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