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장벽의 도시
투명장벽의 도시

기획취재팀 | 김보미(전국사회부) 배문규·김한솔·김지혜(스포트라이트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권익옹호, 문화예술, 인식개선 활동 세 직무로 구성된다. 노동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악기를 두드리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권익옹호, 문화예술, 인식개선 활동 세 직무로 구성된다. 노동자들이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악기를 두드리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이것도 노동일까. 장애인들이 춤추고 노래 부른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발표한다. 휠체어를 타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그냥 하는 것은 아니다. 권리를 말하고, 권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다. ‘권리 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가한 장애인들은 외친다. “이것도 노동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이후 33년이 지났지만, 장애인 고용률은 34.6%(2021년)로 전체 고용률의 절반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중증장애인 고용률은 24.1%, 비경제활동인구비율은 76.2%에 달한다. 중증장애인들은 최저임금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있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노동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최중증장애인들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2020년 새롭게 시작된 일자리 사업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은 장애인의 노동권과 국가가 이를 지원해야 함을 명시했다. 하지만 중증장애인의 절박한 노력이 비극을 낳기도 한다. 2019년 12월 뇌병변장애인이었던 설요한씨(당시 24세)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설씨는 고용노동부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 사업’에 참여해 다른 장애인들의 취업을 돕는 일을 했다. 매달 4명의 참여자를 발굴하고, 각각 5회 차례 만나 상담해야 했다. 수많은 서류와 상담일지, 자조모임일지 작성 업무도 뒤따랐다. 중증장애인이 감당하기 벅찬 업무와 실적 부담이 그를 짓눌렀다.

중증장애인에게 지속가능한 일자리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에서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탄생했다. 3대 주요 직무는 장애인 권익옹호, 문화예술, 장애인 인식개선 활동이다. 최중증 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을 우선 참여 대상으로 하며, 최저임금을 지급한다.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과 불편사항 개선 요구나 장애인에 대한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인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와 연극도 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했던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씨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제공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 제공

문제는 어디까지를 노동으로 인정하느냐인데 ‘권리’를 중심에 둔 노동으로 한정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에 나오는 장애인의 권리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 CRPD 이행 상황에 대한 한국 국가보고서를 심의하면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인권의 지킴이(holders of human rights)로서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일 것”을 권고했다. 한국이 CRPD 내용과 목적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20년 7월 서울시가 처음 시행한 뒤 여러 지자체로 확대되어 올해 692명이 참가중이다. 서울시에서는 주 20시간 ‘시간제 일자리’ 참여자는 월 95만7220원, 주 15시간 ‘복지형 일자리’는 월 71만7920원을 받는다. 생계급여(58만3444원)를 받던 장애인이 시간제 일자리로 일하면 소득 발생으로 생계급여가 깎이지만 총소득은 101만610원으로 늘어난다.

당사자에게 긍정적 효과도 있다. 공공일자리 수행기관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 활동가들과의 관계망이 넓어진다. 시설이나 집에서 고립된 중증장애인들로서는 중대한 변화다. 이들이 공공일자리에 출근하면 가족들도 돌봄 부담을 덜 수 있다.

중증장애인 인구가 98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692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전국권리중심중중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전권협)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내년에 5000명으로 확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사업도 고용노동부 사업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복지가 아닌 ‘노동’으로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은 재화를 생산하지도, 이윤을 창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치활동, 사회운동, 지식생산 역시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노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장애인 노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 노동 전반에 대한 반란일 수 있다.”(정창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간사)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시설에서 살아온 발달장애인 K도, 흔히 와상장애라 불리는 최중증 뇌병변장애를 지닌 J도 인생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평소와 크게 다름없이 노들야학 식구들과 함께 거리에서 자신의 권리를 외칠 것이고, 노들음악대와 아프리카댄스팀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이며, 장애인 인권교육도 해나갈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그들의 그 가치 있는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이제는 인정된다는 점. 이 사회의 모든 K와 J들이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는 그 누구도 노동의 세계에서 배제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뉴노멀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경향신문, [시선]J의 첫 출근과 뉴노멀)

조은소리 전권협 사무국장은 “장애인이 세상에 나와 노동을 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면서 “장애인 노동자의 선택지를 넓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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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장벽의 도시①] 권리를 말하고, 권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면 ‘이것도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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