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덕질을 위하여

문화부 | 박경은 기자

“말도 마라. 요즘 짤줍 한다고 날밤을 새우고 있다니까.”

전화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엔 약간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짤줍’이라니. 평소 국적불명의 유치한 줄임말을 자주 사용하며 아이돌을 찬양하던 내게 ‘나잇값 좀 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친구였다. ‘짤줍’이란 각종 사진을 모아 저장하는 행위로, ‘덕질’(좋아하는 분야나 대상을 즐기는 일련의 행동)의 기본이자 필수다. 말인즉 스마트폰을 붙들고 앉아 대통령 관련 뉴스며 사진들을 찾아보고 저장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유승민 찍었다더니 웬 대통령 덕질인가 싶었다. “F4인가 하는 그 커피 사진이 ‘입구’(덕질 시작)였어. 딸내미가 ‘엄마 하고 있는 그게 덕질’이라며 입을 비쭉거리더라고. 암튼 대통령 사진 보느라 재활용 분리배출도 잊어버리고 집안 꼴도 말이 아냐.”

[기자칼럼]지속가능한 덕질을 위하여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세상의 공기가 달라진 것 같다. 스마트폰만 켜봐도 실감난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엔 앞서 언급한, 대통령과 수석들의 커피 마시는 사진을 비롯해 대통령의 낡아빠진 구두 뒤축을 클로즈업한 사진 등 온갖 사진과 미담이 넘쳐나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에는 새 정부의 출범을 반기고 지지하는 글들로 빼곡하다. ‘살다 살다 대통령 덕질을 하게 되다니’ ‘얼마 전까지 청와대는 드라마를 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청와대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다’ ‘정치 뉴스 보기 싫어 구글만 쓰던 내가 지금은 혹여 놓친 사진 있을까 싶어 뉴스 검색만 한다’ 등등. 대통령이 핵잠수함 개발 필요성을 언급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던 중엔 ‘큭’ 하고 웃음이 터졌다. ‘우리 이니 핵잠수함 갖고 싶었쪄여? 사. 2개 사. 세금 낼게.’ 수백, 수천개 달린 다른 댓글도 비슷했다. 복지 확대를 위해 얼마든지 세금을 내겠다는 여론도 넘실댔다. 서점가엔 20~30대 여성들이 문 대통령 관련 책을 앞다퉈 사들이고, 대통령이 표지모델이 됐던 타임지는 일찌감치 품절이 됐으며 대통령이 다니던 커피집까지 문전성시를 이룬단다.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고, 직원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양복 재킷을 벗는 등 지극히 평범한 대통령의 행동 하나하나는 환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느 정권 초기나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지금 나타나는 현상의 바탕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정서가 있다. 불통 리더십, 비민주성으로 무장해 인간미를 찾을 수 없던 전 정권에서 느꼈던 깊은 절망감과 갈증의 반작용이다. 가장 호감도 높은 전임 대통령으로 꼽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그 결과 지난 9년간 겪었던 민주주의 퇴행기를 다시 겪을 수 없다는 우려와 절박감도 있다. 촛불을 이끌어 낸 주역들의 적극적인 민의 표출이기도 하다.

대중이 ‘덕질’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일각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약간의 노파심은 든다. 새 정권에 대한 합리적인 지적이나 조언에까지 과도한 비난부터 쏟아내는 것은 온당하지 않아 보인다.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맹목적 찬사는 독이 된다. 덕질의 세계엔 이런 명제가 있다. ‘빠가 까를 만든다.’ 과도한 팬질이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결국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지지하는 대상이다.

촛불 민심의 목표는 묵은 원한을 갚고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개혁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지켜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팬덤의 확장성이 있어야 하고 열기도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혁과 적폐청산을 이뤄낼 수 있다. 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가치 있는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다.

난 뒤늦게 ‘입덕’한 내 친구의 ‘덕질’이 문 대통령 퇴임까지 계속됐으면 좋겠다. 박수 받으며 떠난 버락 오바마처럼 떠나보내기에 아쉬운 그런 대통령. 촛불시민들에게 남은 또 하나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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