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음악이 깃든 장소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한때 국립국악원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토요상설 국악공연’의 전통음악 레퍼토리를 섭렵해볼 심산이었는데, 예악당 큰 무대에서 스피커를 통해 전해진 연주들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종묘제례악을 현장에서 듣겠다며 5월 따가운 햇살의 종묘 마당에 앉았을 땐 ‘밤에 해야 멋질 텐데…’ 힘들기만 했다. 2000년대 초의 일이다.

[문화와 삶]전통음악이 깃든 장소들

오히려 잊지 못할 장면은 1986년 창덕궁 옆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봤던 사물놀이 상쇠 고 김용배 추모굿. 1990년대 초반 지리산 자락에서 들은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였다. 공간사옥 앞마당까지 가득 메운 인파 속에 처음 본 굿판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면, 학술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초야의 한 노인이 들려준 역동적인 가야금 소리는 전통음악을 온몸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몇 년 후 석 달 속성으로 배운 가야금을 들고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그때의 경험에서 촉발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에서 본 박병천의 진도 씻김굿과 김금화 만신의 진오귀굿 공연도 기억에 또렷하다.

귀국 후에는 남도들노래를 부른 조공례의 놀라운 내공과 정권진 판소리의 품격에 깊이 매료되었고, 국악 연주자 지인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우리 장단의 무궁무진한 변화 가능성, ‘성음’이나 ‘이면’ 같은 미묘한 소리 세계를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작업에 매진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수제천’의 미적 특징을 내재적으로 변화하는 선적 흐름과 그 속에 존재하는 미시적인 음향세계로 분석한 논문도 썼지만, 전통음악 연구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어설프게 한 발만 담가선 다루기 힘든 엄청난 복잡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북촌 일대의 한옥들과 원서공원에서 열린 ‘북촌우리음악축제’(예술감독 허윤정)를 보며 전통음악의 장소성을 생각했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공간’과 달리 ‘장소’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고, 개인이나 공동체가 오랜 시간 관계 맺으며 형성되는 것이 장소성이다.

전통음악은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 녹아든 것이었음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놓인 북촌을 전통음악의 숨결이 살아있는 장소로 만들어가는 일은 잃어버린 터전을 현재의 삶 속에 복원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북촌의 한옥·갤러리·공방 등에서 6년째 이어져 온 이 축제는 전통국악과 창작국악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젊은 국악인들이 전통을 그들의 감각으로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전통이 깃든 장소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새롭게 거듭난다.

대형 공연장의 관행적인 전통음악 연주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건 그 음악의 고유한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해서다. 5월 말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마련한 ‘경복궁 음악회’는 연주자들을 따라 궁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야경 속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색다른 시도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 레퍼토리를 경복궁이라는 장소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흥례문 광장에서 ‘대취타’로 시작해 왕의 집무실과 침소 옆 우물, 왕비의 후원을 지나며 ‘상령산’, 정악시나위, 경기 잡가 등을 연주하고, 마지막 교태전에서 ‘춘앵무’로 끝나는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그것이 향유되던 장소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옛 음악을 한층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리라. 고궁음악회는 국악만이 아니라 클래식·재즈·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장소성을 고려한 프로그램 구성은 흔치 않다.

창덕궁 앞에서 종로3가 네거리에 이르는 길은 ‘국악로’라 불린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국악교육기관이 밀집해 있던 국악 활동의 근거지였다 한다. 2016년 이 역사적인 장소에 ‘돈화문국악당’이 개관했다. 근현대사에서 전통음악이 깃든 장소들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옛 레퍼토리를 현재화하는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된다면, 전통음악도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고전으로 감상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종묘제례악 야간 공연이 생겼다. 종묘에서 밤에 듣는 보태평과 정대업은 어떨지 내년에는 꼭 다시 찾아가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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