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평가 아닌 진짜 여성 서사를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marvelous - 꾸민 듯 안 꾸민 듯, Heroic - 러블리한 날.’ 누가 봐도 영어단어와 우리말의 조합이 이상하다. 미묘하게 어감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석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미국의 연방대법원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다룬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영화의 내용보다 이 형편없는 오역 홍보물로 먼저 유명해졌다. 소수자의 인권과 성평등의 가치를 외치던 훌륭한 법조인 긴즈버그를 소개하는 데 왜 이런 단어가 쓰이는지, 그가 제발 한국판 포스터 사건을 모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선]외모 평가 아닌 진짜 여성 서사를

그렇다면 이런 번역은 어떻게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 외에도 원문에 있는 leader(리더), justice(정의), lawyer(법률가)의 단어가 독보적인 스타일, 데일리룩 등으로 번역된 이유는 여성을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당시 캘리포니아 법무부 장관에게 best looking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하루 만에 사과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훌륭한 여성을 소개하고 싶다면 그저 그 사람이 이뤄낸 대단한 것에 대해 말하면 된다. 답은 멀리 있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잘한 점을 설명한다’는 쉽고 간단하고 직관적인 방법이 있으니 굳이 외모 패션 스타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고 평가하는지 말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야 ‘앞서가는 정의로운 법조인’이 ‘스타일 좋은 핵인싸’로 바뀌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현 의사에 대한 여성가족부 블로그의 소개글은 몹시 아쉽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효부이자 열녀, 열사였다는 첫 설명부터 영화 포스터 사건과 맞물린다. 수많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배울 때 난 그들이 좋은 남편 혹은 좋은 사위였는지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설사 그들이 가족을 살뜰히 챙기지 못하였다고 해도 커다란 목표를 위해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아픔이라고 배워왔는데, 왜 여성 운동가에게는 며느리 역할을 잘해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해냈는지보다 먼저 또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을까.

심지어 항일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남편의 원수를 갚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가능하다면 정말 본인께 여쭤보기라도 하고 싶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남편을 잃은 지 20년이 지난 뒤 갑자기 문득 복수를 시작했다는 설명이 될 테고 혹 사실이 아니라면 내 나라를 되찾겠다는 남자현 의사의 숭고한 결심을 개인적 감정의 앙갚음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너무 큰 실례가 아닐까. 누구 못지않게 큰일을 해내신 독립군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의 어머니’라 칭하는 것도 화가 나지만 어릴 때부터 단아했다는 설명 또한 한숨이 나온다. 영화배급사가 변호사에게 러블리 운운하는 것도 속상했는데 독립운동가에 대한 여성가족부의 얼평, 몸평을 보고 있자니 전문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여성을 말한다는 것은 그저 이름을 알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개인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을 때 포스터처럼 inspiring이 ‘포멀한(스타일의 옷을 입은) 날’로 바뀌는 것이다.

최근 들어 여성의 서사를 드러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거나 부당하게 뒤로 밀려났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복원하는 작업은 그들의 공적을 재평가할 기회인 동시에,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영감을 제시한다. 힘들게 찾아보지 않아도 학교에서, 책에서, TV에서 예술가 나혜석과 디자이너 노라노, 기자 최은희, 변호사 이태영을 누구나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연아가 있고 난 뒤 이제 수많은 연아키즈들을 빙판 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줄 텐데 말이다. 얼마나 예쁜지 따위의 설명이 사라진 진짜 여성 서사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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