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길을 묻거든 ‘지방’을 보게 하라

김태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희성의 시 한 구절을 흉내낸다.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지방’을 보게 하라. 여의도정치의 시야는 여전히 뿌옇기만 한데, 지방정치에서 희망의 단서를 찾아보자는 얘기다. 21대 국회는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막다른 골목 분위기인데 지방정치는 그렇지 않다. 과거, 여의도정치가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막장드라마로 가고 있던 그 기간에도 지방에서는 이른바 ‘협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태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2014년 민선6기를 시작하면서 각 지방정부는 경쟁이라도 하듯 ‘협치’를 추진하였다. 협치의 앞장은 역시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 박원순의 협치는 과제해결형이었다.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다양한 가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법이었다.

이에 비해 남경필 경기지사의 협치는 선이 굵은 정치적 그림이었다. 부지사와 주요 간부직 일부를 경쟁 당에 할애했다. 이른바 연정 모델이었다. 서로 대결하는 세력이 협력하는 구조를 만들어서 권한과 책임을 공유했다. 이것은 제안, 공론, 매듭 과정에서 단계마다 화제를 뿌리고 관심을 모았다.

그다음으로 주목을 받았던 충남도지사 안희정은 충남도민회의를 만들어서 다양한 정파, 종교, 나이, 성별의 도민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직접민주주의 형식을 통한 협치였다. 이것은 좀 엉성한 그릇처럼 보였지만 충남도의회라는 대의기구가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흥미 있는 정치적 실험이었다.

대구시장 권영진도 대구의 첫 정치인 출신 시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적극적 협치에 나섰다. 숙의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민원탁회의를 도입하여 시민사회의 시정 참여를 촉진했고, 주민참여예산제도를 과감하게 밀었다. 새로운 시청사 입지를 결정하는 데 시민대표를 무작위로 뽑아 공론과정을 거쳐 결정하였는데 수용성이 놀라왔다. 대구라는 도시의 보수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획기적 시도였다 하겠다.

원희룡 제주도지사의 협치 실험도 눈길을 모았다. 그는 도지사가 임명할 수 있는 제주시장에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시민운동가 출신 인사를 임명했다. 신선한 시도였다. 이것은 시작부터 정치적 반발에 부딪쳤으나 원희룡은 애초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이는 독특한 제주의 정치문화를 개혁하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었다.

다른 지방정부에서도 시민사회와 정치적 경쟁세력을 의사결정에 참여토록 함으로써 지역의 잠재력을 최대화하려고 했다. 여의도정치가 이념과 정파에 따라 끝도 없이 대결하고 있을 때, 지방정치는 협력과 연대의 힘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런 실험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8년 민선7기에 와서도 지방정부 수준의 협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박원순의 협치 틀은 더욱 촘촘해지고 문제 해결의 효능성도 높아졌다. 모든 민주당 지방정부에서 협치는 기본 상식이 되었다.

눈길을 끌었던 원희룡은 민주당 출신 고희범을 제주시장에 임명하면서 협치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고희범은 민주당 제주도당 위원장, 도지사 후보, 상임고문까지 지낸 제주의 대표적 진보진영 지도자다. 고희범 제주시장 임명은 조직적 결합은 아니었지만 민주당 인사를 행정시장에 임명하여 협치의 취지를 실현한 것이었다.

최근 대구광역시장 권영진은 민주당 19대,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의락에게 경제부시장을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미래통합당 대구시장과 민주당 전 국회의원 사이의 협력이 성사될 것인지가 큰 관심사다. 그것이 보수의 안방이라고 불리는 대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당을 뛰어넘는 협력이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잘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여의도정치와 달리 지방정치에서는 협치가 다양한 동기, 다양한 형태로 추진되고 있다. 어떤 것이든 가치와 이익을 달리하는 행위자들이 협력과 연대를 통해 공동선을 찾아가는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다. 벌거벗은 권력투쟁으로 세월을 허송한 20대 국회에 상심했는데 21대 국회도 벽두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지방정치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개원 벽두부터 ‘법사위원장’ 문제 하나 풀지 못하여 몇 주일을 보내고 있는 여의도정치는 갈 길이 아득하다. 여야 지도자들은 부디 길을 잃지 않기 바란다. 길을 모르겠거든 눈 들어 ‘지방’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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