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인 건강가정기본법, 시급히 개정해야

예전에 지인이 내 옷차림을 보고 ‘단체 대표가 그런 옷 입고 다녀도 돼?’라고 한 적이 있다. 스치듯 한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옷을 입을 때면 그 ‘말’이 떠오르고 스스로 검열하는 나를 발견했다. ‘말’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말’은 그 사회 문화, 구성원의 의식과 사고, 사회구조와 통념을 반영하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말’은 지켜야 하는 ‘규범’이 되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기준’이 된다. ‘말’은 스스로 자책하고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낙인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다. ‘말’은 차별과 배제, 혐오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차별 표현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있다. ‘결손가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 중 한쪽 또는 모두 없는 가정을 뜻한다. 언뜻 생각하면 가족의 모양이 다양하니 구분하는 말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말은 ‘완전’하고 ‘정상’적인 기준이 되는 가족형태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 형태는 ‘정상’이고 이와 다른 가족 형태는 ‘불완전’하고 ‘결핍’되었으며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한다. ‘가정·가족’을 생각하면 이성애 부부와 자녀가 있는 특정한 이미지나 TV 광고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불완전’ ‘결핍’ ‘비정상’은 채우고 교정해야 하는 것이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성애 ‘정상’ 가족과 다른 모양을 가진 가족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정당화되고 편견은 강화된다. 동시에 기준이 되는 ‘정상’ 가족의 위상은 공고해진다. 다양한 가족을 선택한 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은 부정되고 다양성은 사라진다. ‘결손가정’이 차별 표현인 이유다.

어떠한 모양의 가족이든 구성원 모두 서로 돌보고 존중하며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상의 평화와 안녕, 존엄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존엄과 안녕을 돕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책무이다. 책무 이행이라는 선한 출발과 달리 법이 차별과 배제를 강제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건강가정기본법이다. 국가가 법을 통해 특정한 가족 형태를 ‘건강가정’이라고 규정한 순간 다양한 가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정당화되는 역설이 생겼다. 건강가정기본법은 위험한 인권침해 상황을 조장했고 가정폭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여성을 옥죄는 법으로 작용했다. 엄연한 현실도 못 따라가는 낡은 법일뿐더러 다양한 가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나쁜 법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가족 단위 재난지원금 지급 과정에서 ‘건강가정’이라는 허상이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임을 깨달았다. 다행히 국회에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국회는 조속한 개정으로 나쁜 법을 바로잡아야 한다. 차별과 배제는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개정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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