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벌린 돈주머니를 가지고 와주면….”

차준철 논설위원

“그에게 입 벌린 돈주머니를 가지고 와주면 자객은 칼을, 그러니까 펜을 칼집에 다시 집어넣는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짐작한 대로, 기자다. 1800년대 프랑스의 기자다. 어느 출판사에 돈을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전날 새 책 소개 기사를 이렇게 썼다. “부정확하게 말하거나 쓰는 기술을 알려주는 작은 책인데, 행인들을 웃겼다는 이유로 비싼 돈 주고 사야 한다.” 당황한 출판사가 돈을 건네자 그는 이튿날 바로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고 한다. “우리 시대 최고 지성들이 쓴 이 책 말고 어찌 다른 것을 읽겠는가….” 웃기고 황당한 일인데 왠지 씁쓸하다. 두 세기 전 일이 요즘 얘기 같아서다.

차준철 논설위원

차준철 논설위원

자객뿐이 아니다. 허풍꾼, 낚시꾼, 아첨꾼, 게릴라에다 공염불을 하는 자, 직에 연연하는 자, 하나만 우려먹는 자 등등 그 시대 기자와 언론계 종사자들을 풍자해 가리킨 별칭이 참 많다.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1842년에 낸 책 <기자 생리학>에 나오는 얘기다.

발자크는 언론계 사람들을 생물학 분류법처럼 종(種)별로 세분해서 습성과 행동을 기술했다. 공적인 정보와 여론을 만드는 이들을 우선 논객, 비평가 등 2개 종으로 대별한 뒤 수십 가지의 하위 ‘품종’으로 정리한 것이다. 예컨대 ‘직에 연연하는 자’는 정·관계 진출만 생각하는 품종이고, 피부에 달라붙어 사는 기생충처럼 공공의 부를 좀먹으며 사반세기를 살아왔다고 했다. ‘기자 겸 정치인’ 종도 있는데, 국가의 장래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고 아첨에 매달리며 제 이익만 좇는다고 했다. 낚시꾼은 조회 수로 돈을 벌고자 얄팍한 기사를 남발하는 요즘의 그 사람들과 같다.

기자로도 활동한 발자크가 자신이 보고 겪은 경험을 토대로 파헤친 언론계 세상은 지금 얘기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당시 언론계에 통한다는 명제들도 제시했는데 이 또한 현재의 실상과 거의 들어맞는다. “우선 때리고 변명은 나중에” “개념이 없을수록 승승장구한다” “누군가의 사상을 비방하거나 중상모략하는 것을 교정할 치안 정책은 없다” “어떤 종류의 구독자가 되었건, 구독자가 늘지 않는 신문은 망한다” 등이다. 또 “부끄럽게도 언론은 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만 자유롭다” “판에 박힌 자들이 만드는 언론은 개혁을 두려워한다”는 말도 뼈아프게 들린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기자와 언론의 역할과 자세를 새삼 떠올린 건 최근 금품 로비 의혹 사건에 다수의 언론계 종사자가 거명되고 있어서다. 100억원대 사기 혐의로 구속된 자칭 수산업자 김모씨에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전직 신문사 논설위원과 현직 종합편성채널 앵커가 입건된 데 이어 현직 기자 2명과 기자 출신 유튜버도 조사 대상에 올라 있다고 한다. 수사당국이 금품 수수의 대가성 여부를 엄정히 수사해 위법을 가릴 테지만, 전·현직 언론인이 의혹에 휩싸인 것만도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 사기꾼인 김씨에게 언론계·정계 인사들을 소개했다는 사실도 유감이다. 금품과 권력의 유혹에 취약한 언론계 실상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게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 개인의 일탈과 비리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였던 고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남긴 ‘기자의 덕목’ 4가지를 다시 새겨본다. 리 선생이 2008년에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로 전한 것이다. 첫째는 전문적인 지식이고 둘째는 올바른 세계관, 셋째는 성실성이다. 그리고 넷째가 가난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다. 선생은 “기자라면 가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꾸려나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가난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기자가 검소하지 않으면 돈의 유혹, 권력의 유혹에 이용당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청빈(淸貧)’을 강조한 넷째 덕목은 너무 옛날식 교훈 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가난을 모르는 요즘 세상에 가난하게 살라니…. 하지만 때마다 터져나오는 기자들의 금품 스캔들을 보면서 넷째 덕목을 더 깊이 새기게 됐다.

발자크는 19세기 언론 세상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날카로운 풍자로 비판한 것이라 기자와 언론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더욱 명확히 제시했다. 발자크가 비꼬고 조롱하지 않을 기자와 언론이 제대로 된 모습이다. 1800년대나 지금이나, 기자와 언론이 손가락질받는 게 똑같다. 가짜뉴스, 유언비어, 저질·편파, 아니면 말고식 보도…. 세상은 변했는데 언론계는 한 치도 바뀌지 않아서 그렇다. 이제라도 대오각성해야 한다. 자성이 언론개혁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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