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 <결핍의 힘> 저자

오래전 일이다. 노숙인 인문학 강좌의 졸업생 한 분이 암 판정을 받고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알려왔다. 바로 달려갔다. 피부는 새카맣게 타들어 갔고, 복수가 차 있었다. 말기에 접어든 것이 확실해 보였는데 대뜸 딴소리다. “병원이 나를 죽이려고 이상한 약을 먹이려고 합니다. 교수님이 저 좀 살려주세요.” 침대 옆 가방의 지퍼를 열자 푸른빛 알약들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었다. 입원 첫날부터 모은 것이라고 했다.

최준영 <결핍의 힘> 저자

최준영 <결핍의 힘> 저자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함께 휴게실로 나가 기나긴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쏟아졌다. 젊어 잘나가던 시절, 결혼해 단란하게 살던 시절, 사업실패로 괴로웠던 시절, 교통사고 후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람에 행려자로 전락한 이야기 등등. 말미엔 부탁의 말이 매달려 있었다. 가족, 특히 아들을 찾아달라는 부탁이 아닐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인문학 강좌 동료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해 어느 봄날이었다. 노숙인 인문학 강좌의 1기 졸업생과 2기 졸업생, 3기 재학생까지 30여명이 한강 둔치에 모였다. 내가 무리 좀 했다. 단체 티셔츠를 맞췄고, 강 건너 식당에 돼지갈비도 넉넉하게 재워났다. 평소엔 한강공원관리인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던 분들이지만 그날만은 보란 듯이 크게 웃었고 힘차게 뛰었다. 점심 무렵 환자복을 입은 그분이 복지사와 함께 나타났다. 힘겨워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다. 낮은 목소리로 짧은 말을 뱉어냈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잘 놀다 간다. 부디 여러분은 사는 동안 열심히 공부하시라. 나는 먼저 간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

며칠 후 부고가 날아왔다. 역시 달려갔다. 행려자 혹은 무연고자의 사망인 경우 장례절차 없이 곧바로 화장하는 게 통상적인 절차라는 병원 관계자의 설명을 들었다. 속이 상했다. 책임지고 장례절차를 밟겠노라고 우겼다. 다행히 사회복지사가 동의해줬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단 하루 장례를 치르더라도 최소 수백만원이 든다. 고인을 위한 수의와 관을 구입해야 하고, 문상객을 맞으려면 일정 인원 이상의 음식을 주문해야 한다.

저녁 무렵부터 문상객이 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인문학 강좌의 동료들이거나 노숙인 쉼터의 직원 혹은 사회복지사들이었다. 경찰의 협조를 받아 수소문한 끝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끝내 오지 않겠다고 했다. 부득이 상주 역할은 내 몫이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문상객이 늘어났다. 얼핏 봐도 거리의 삶을 사는 분들이었다. 음주는 금하노라고 여러 차례 알렸지만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뒤 화장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거리의 동료들 대부분이 함께 버스에 올랐다.

장례절차를 마칠 무렵 복지사와 비용문제를 상의했다. 일단 카드로 결제하자고 했더니 사회복지사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별 기대 없이 부의함을 개봉했더니 꽤 큰돈이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120만원. 순간 울컥했다.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돈이 어떤 돈일지 너무도 잘 안다.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 비상금이다. 꼬깃꼬깃 접어서 바짓단 속에 넣은 뒤 아예 입구를 꿰매버렸던 바로 그 돈이다. 안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놓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꺼내지 않는 목숨과도 같은 돈이다. 바로 그 돈을 꺼내서 봉투도 없이 날것 그대로 부의함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 1000원권, 5000원권, 1만원권 지폐가 모여서 120만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다. 다 같은 사람이다. 비록 거리의 삶일망정 사람이, 사람이 아닐 순 없다. 사람이어서 웃고 울고, 사람이어서 기뻐하고 슬퍼한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이의 죽음은 역시 거리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타인의 죽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이다. 인생의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서 노잣돈에 보태는 이유다. 해마다 거리에선 300여명이 죽는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