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영토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신분증 사본, 통장 사본, 명함 스캔본 또는 이력서, 개인정보 활용동의서. 논문 심사를 했더니 심사비를 지급한다며 개인정보를 요청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려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내 개인정보를 알려주자니 왠지 찜찜하다. 심사비 안 받을 테니 봉사한 셈 쳐달라고 했다. 더는 연락이 없다. 얼마 전 동료가 들려준 에피소드다. 현장 연구를 위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교인 수첩을 만들려고 하니 주소, 전화번호, 직업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니, 당황한 듯 같은 교인끼리 그것도 안 알려주냐고 되물었다. 교인 수첩이라고 교인만 보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맞받자, 별 까탈스러운 사람 다 있다며 투덜댔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치과에서 흔히 겪는 일 하나. 한 달 전 예약이지만, 손님이 많은지 이삼십분은 족히 기다린다. 약간 짜증이 난 상태에서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치과 의자에 눕혀진다. 금방 온다던 의사는 오지 않고 한동안 멍하니 드러누워 있다. 고개를 드니 바로 눈앞에 커다란 모니터가 일어선다. 성별, 나이, 이름, 환자 번호. 방금 치료받고 나간 환자의 개인정보다. 음, 잇몸이 내려앉아 치아 상태가 좋질 않군. 어금니 위아래로 임플란트를 8개나 하다니. 사십대 중반 여성이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한창 청년인데 도대체 어떤 고단한 삶을 살았길래 치아가 이렇게나 망가졌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치료를 마치고 떠나면 누군가 내 진료 모니터를 감상할 걸 생각하니 씁쓰름하다.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20대 직장인 여성. 퇴근 후 평소처럼 쓰레기를 버리려고 현관문을 연다. 두 명의 낯선 남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경찰이라며 다짜고짜 현관문을 제치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놀란 가슴에 경찰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청한다. 신분증을 보여주는 시늉만 할 뿐 소속과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112에 신고한 끝에 낯선 두 남자가 경찰임을 확인한다. 그런데도 불쾌한 심정을 떨칠 수 없어 국민권익위원회에 검문 방식이 적절했는지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단속 현장에서 범죄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관찰, 대화 등 사전 절차를 소홀히 한 채 불심검문을 하고, 그 과정에서 신분증 제시, 소속 및 성명 고지 등을 소홀히 한 경찰관의 행위는 부당하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최근 경찰이 옛 동거녀의 중학생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한 피의자 2명의 이름, 나이, 얼굴을 공개했다. 애초 신상 공개 지침상 ‘잔인성’과 ‘공공의 이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비난 글이 올라오고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뒤늦게 변호사, 정신과 의사, 교수 등 외부전문가 4명과 경찰 내부 전문가 3명이 모였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 재범방지, 범죄예방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신상 공개가 필요하다고 ‘7인의 전문가’가 판단했다.

굳이 널리 알릴 필요까지는 없는 내 신상정보를 누군가 마음대로 접근한다면? “그것이 알고 싶지 않다”는 데도 사익이나 공익의 이름으로 남의 신상정보에 강제로 노출된다면?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정의한 ‘자아의 영토’ 개념은 궁금증을 풀어준다. 동물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동물에게 영역권을 주장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이 영역이 자아의 영토일 뿐이다. 아무리 세속화된 현대사회라지만, 민주주의 덕분에 개인의 자아는 성스러운 대상으로 올라섰다. 자아의 영토는 겹쳐지는 경우가 많아 그 경계를 함께 돌볼 때만 성스러움이 보장된다. 고프먼은 저서 <수용소>에서 비록 영역권 주장을 상실한 죄수라 하더라도 그들 자아의 영토가 무차별적으로 짓밟힐 때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수용소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아의 영토에 대한 인식을 다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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