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레마와 ‘모가디슈’ 깻잎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연예인 부부가 방송에 나와 깻잎 때문에 싸운 사연을 이야기했다. 여자 후배와 함께 식사하던 중 후배가 깻잎을 먹는데 잘 안 떼어지자 남편이 젓가락으로 아래 깻잎을 잡아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냥 매너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남편과 여자 후배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랬다는 부인 간에 소위 ‘깻잎 전쟁’이 생긴 것이다. 남편 속내는 모를 일이니 뜨끔했을지도 모른다. 과도한 의심과 오해일 수도 있다. 평소에 의심받을 만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 당연히 나쁜 의도일 것이라고 단정 짓고 매도하는 것이 올바른지는 모르겠다. 그 정도로 믿지 못하면 같이 살 이유가 없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생사의 기로에 선 남북 대사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있다. 남한대사의 부인이 깻잎을 먹으려는데 잘 떼어지지 않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북한대사 부인이 말없이 한쪽을 잡아준다. 최근 코로나19를 뚫고 개봉한 한국영화 <모가디슈>의 한 장면이다. 남북이 서로 말을 걸거나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시절, 먼 아프리카 소말리아 내전 속에서 그렇게 그들은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감독은 남북이 힘을 합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극복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고, 자루도 마주 벌려야 잘 들어간다고 했다. 서양 속담에도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 머리가 낫다)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서로 힘을 합하면 더 쉽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의 의미가 가슴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속담도 “댓글도 혼자보다 둘이 낫다”로 바뀌어 갈지도 모른다. 지나간 다툼에 “흘려보낼 건 흘려보냅시다”라는 북한대사의 말이 MZ세대에게 던지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 제언처럼 들린다.

지금 남북을 둘러싼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미·중 대결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지난 150여년 동안 한반도가 맞닥뜨린 그 어떠한 상황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미·중 갈등 속에 외교적 해법과 남남 갈등 속에 국내 정치적 계산을 남북관계 진전이란 톱니바퀴와 함께 돌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하나를 이루려면 다른 것은 이룰 수 없다. 이를 두고 한반도가 직면한 3중고, 혹은 트릴레마(trilemma)라고도 한다.

미·중 사이에 외교문제나 혹은 남남 갈등 해소를 우선하려다 보면 결국 다른 두 가지는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세 가지 문제가 서로 얽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딱 그 모양새다. 한반도 트릴레마는 분명 현실이다. 그렇지만 숙명은 아니다. 한반도의 타고난 운명도 아니고 절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고 주저앉아서도 안 된다. 미·중 대결의 심화 속에서 한반도의 주인인 남북이 서로의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서 한반도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남남 갈등 역시 성숙한 시민의식 속에 남북관계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만들어갈 용기만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다 해봐야지…”라는 영화 속 남한대사의 말처럼 남북관계만이 얽히고설킨 한반도 트릴레마를 해결할 실마리이다.

지난 몇 주 사이에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13개월 만에 복원된 남북 통신연락선이 2주 만에 다시 불통이다. 누굴 탓하기 전에 어찌 보면 예상된 일이다. 깻잎을 먹으려면 누군가 잡아주기만을 바라선 안 된다. 먼저 먹고자 하는 쪽이 깻잎을 힘주어 당겨야 한다. 결국 아래 깻잎을 잡아준 사람도 편히 먹을 수 있다. 평양에서 혹은 서울에서 깻잎을 서로 잡아주고 당겨주고 할 수는 없는 걸까? 그것조차 못하면 남북이 함께할 이유가 없다. 어느 한쪽이 안 잡아준다고 깻잎 여러 겹을 덥석 집어와 혼자 먹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영화 속 북한대사의 “사람한테는 인격이 있고, 나라에는 국격이 있듯이 외교에도 격조가 있는 거요. 우린 자존심까지 내놓고 오진 않았소”라는 대사가 맴돈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미·중의 대결 속에서도 격조 있는 외교를 통해 한반도 평화를 실현해 국격을 올릴 수 있는 인격을 갖춘 후보에게 소중한 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말보다 행동, 꿈보다 용기를 가진 후보가 없다면 내 자존심까지 버리고 투표장에 나가고 싶지 않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