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 있는 온건함, ‘메르켈하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올 9월 독일에서 총선이 치러지면 16년간 총리를 지낸 앙겔라 메르켈이 물러난다. 재선 가능성이 있는 현직 총리가 출마하지 않는 것은 독일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메르켈 총리에게 붙는 ‘첫’이나 ‘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장수 총리, 유럽 내 최장수 여성 총리, 최연소 여성청소년부 장관,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 등.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메르켈 총리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노드스트림2(Nord Stream2)’를 확보했으며, 장관 재임 시절부터 통일 후 사회적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실업률 감소에 뚜렷한 성과를 보였으며, 코로나19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대외적으로도 유럽연합의 붕괴를 막아 독일의 입지를 다졌으며, 난민 포용 정책을 통해 국제적 신망을 얻었다. 물론 과(過)도 없지 않다. 2013년 선거를 제외하면 기민연의 득표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난민 포용 정책은 극우 정당의 득세를 초래했다. 유로존 위기에 긴축 정책으로 대응해 독일 패권주의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 사람들은 메르켈 총리를 ‘엄마(Mutti)’로 부르며 존경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며 그 인기가 대단하다. 메르켈의 리더십은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면서도 정책을 관철시키는 ‘메르켈리즘(Merkelism)’으로 표현된다. ‘메르켈하다(merkeln)’라는 신조어도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모호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물쭈물하는 것으로 비아냥거릴 게 아니다.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면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뚝심 있는 온건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더십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인물에 대한 호평을 추가하기보다 그러한 리더십이 등장할 수 있는 제도와 정치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합리적 정치를 꼽을 수 있다. 기민연과 사민당이 주도하는 내각이 교차 집권하지만 합리적 정책은 연속성을 가지고 추진해 왔다. 기민연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완성하고 사민당이 그 복지 정책을 이어받았으며, 사민당이 토대를 닦은 통일 정책을 기민연이 승계해 통일을 완수했다.

둘째, 분단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관용이 가능하다. 양극단은 제한하지만,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관용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독 출신의 정치인을 총리로 선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치 문화에서 가능했다.

셋째, 반성과 청산에서 좌고우면하지 않는 역사적 성찰이다. 나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해 유태인에게 거듭 사과하며 이를 교육적으로도 실천하고 있다. 나치즘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을 역사 교육에 철저히 반영해, ‘나치 같다’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의 하나로 인식된다고 한다.

넷째, 합의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다. 연방제를 통해 지역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자치 분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비례 대표제를 채택함으로써 소수자의 이해관계를 정치에 반영하며 양보와 타협의 연합 정치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처음부터 갖춰진 것은 아니다. 나치즘이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 정치를 겪었으며, 분단도 중요한 역사적 난관 중의 하나였다. 2차대전 이후 나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68혁명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의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냈다.

다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양대 정당 중심의 타협이 담합으로 변질돼 기득권 정당의 카르텔 정치가 생겨난 것이다. 양대 정당의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소수 정당의 지지율이 올라간 것이 그 방증이다. 메르켈리즘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다. 보수 정당 기민연 소속 총리인 메르켈이 사민당과 녹색당의 탈원전 정책을 수용하고 지지율 하락을 무릅쓰면서 난민 포용 정책을 편 것이 좋은 예다.

우리나라에는 왜 메르켈 같은 정치인이 없을까 하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치인이 등장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제도와 문화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위대한 정치인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제도와 문화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메르켈이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동독 시절에서처럼 제도권 정치 참여를 거부했거나, 참여하더라도 이러한 제도 수립과 문화 형성에 먼저 나서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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