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여정’에 동참 안 하실래요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21대 국회에 4차례 발의된 차별금지법·평등법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내용이 있다. 증명책임의 배분이다. 일반적인 민사소송의 경우 원고가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에 비해 차별 관련 소송에서는 원고는 성별 등을 이유로 불이익한 대우가 있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고, 이러한 대우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은 피고가 증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증명책임의 배분을 두고 주장만 하면 차별이 인정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별 등을 이유로 불이익한 대우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차별의 가해자부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이유를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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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한 판결이 있었다. 2017년 퀴어여성네트워크가 제1회 퀴어여성생활체육대회를 동대문구 체육관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성소수자 행사라는 이유로 민원이 제기되자 체육관 측에서 대관을 취소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아쉽게도 퀴어여성네트워크 측의 손해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 판결이 나왔지만 대관 취소 자체가 위법했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정되었다.

이에 대해 대관 취소 당시부터 소송 진행 전 과정에서 피고 동대문구 측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대관을 취소한 것은 갑작스럽게 공사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지 성소수자 행사여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을 보면 취소 당일 체육관 관리팀장은 국가인권위에 전화를 걸어 민원이 들어오는데 취소를 해도 되는지를 물어봤고, 이에 대해 상담원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대관을 취소하면 차별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동대문구 측은 차별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 상태에서 대관 취소를 감행하고는 계속해서 성소수자라서 차별한 게 아니라 공사 때문이었다는 핑계를 대온 것이다.

이렇게 명백한 성소수자 차별임에도 다른 핑계를 대는 일은 최근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의 사단법인 설립을 불허한 사건에서도 일어났다. 서울시는 조직위에 불허 공문을 보내며 그 이유로 조직위가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받았다거나 반대 단체와의 충돌 예방에 행정력이 소요된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기소유예 부분은 사실도 아닌 내용의 기사를 엉터리로 인용한 것이었다. 반대 단체와의 충돌 역시 성소수자 혐오에 기반하여 축제 개최를 가로막는 이들의 문제라는 점에서 전혀 법인 설립 불허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얼토당토않는 이유가 지자체의 공적 문서에 적시된 것이다.

왜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핑계를 대는 것일까? 이런 행태를 보고 있자면 차라리 이 모든 차별적 행정의 내심에 깔려 있는 성소수자 행사, 단체라서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나을 정도다. 물론 공공기관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서 4명 중 3명이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한 존재라고 답한 것처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이 다르다고 배제·거부하는 것은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이 차별을 하고 있음을 인정할 용기도,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받아들일 자세도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국 이러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퀴어여성네트워크는 법원의 손해배상 기각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 역시 법인 설립 불허에 대해 법적 조치를 하기로 했다. 이러한 법적 투쟁을 통해 차별적 행정의 위법함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들은 누구나 존엄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여정에 행정과 정치도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더 이상 차별 의도를 드러내는 뻔뻔함, 갖은 핑계를 대는 비겁함이 아니라 평등을 위한 여정에 함께하겠다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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