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의 정치와 언론의 도구화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것은 사화의 정치다. 정적은 물론 가족과 지인의 신상까지 꼬투리를 잡아 정적 집단 전체를 제거하겠다는 싸움 말이다. 이념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당파란 어느 시대나 있으며, 정치란 정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를 다시는 정쟁에 참여하지 못하게 찍어내자는 싸움은 정쟁을 넘어선다. 제6공화국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나 했더니, 지난 10여년간 일어난 정파 간 복수혈전은 조선시대 사화를 방불케 한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사족이 인민을 위해 이념과 기예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부족집단이 되어 반대파를 멸문과 폐족으로 이끌기 위해 중상하고 모략하면 사화의 시작이다. 사태가 잔인하고 참담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의 이해와 가치와 별 상관없는 사족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조국 전 장관의 편이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편이든, 아니면 환멸에 지쳐 떨어진 방관자이든 마찬가지다. 이 싸움에서 멸문한 사족의 긍지보다 보잘것없는 게 당신의 이익이다. 누가 이겨도 당신은 이긴 게 아니다.

날조와 참언, 고발과 고소가 정치의 언어가 됐다. 어떤 이는 정치의 사법화를 염려하지만, 그전에 정적에 대해 비방과 참언을 동원해서 고소와 고발로 옭아 놓고 지지자를 동원해서 송사로 몰아가는 루틴에 주목해야 한다. 이 방법은 520년 전 이 땅에서 정적의 말과 글을 꼬투리 잡아서 권력자의 원한을 일으켜서 싸웠던 그 방식을 닮았다. 지금은 국민 주권이 왕권을 대신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화의 정치는 언론을 도구로 활용한다. 사실 언론이란 그 자체가 매개체인 하위 체계이며, 따라서 도구화가 자연스럽다. 그런데 현대 민주정에서 언론의 도구화가 위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바로 권력이 자신만을 위해 언론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다. 집권세력이 반대파를 억압하는 데 언론을 동원하고, 강자가 약자의 불평을 무마하기 위해 언론사를 만들고, 부자가 빈자의 기회를 빼앗기 위해 언로를 장악하는 경우가 위험하다.

그렇다면 반대파가 주로 활용하고, 약자가 강자를 감시하고, 빈자가 기회를 살리는 데 사용하는 언론은 좋단 말인가?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렇다. 다만 민주정에서 다음에 누가 집권할지 예상하기 어렵고, 약자와 빈자가 주장하는 권리는 강자와 부자가 누리는 그것과 원리적으로 같다는 조건을 더해야 한다. 요컨대 언론은 홀로 잘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정의 책임 정치와 법적 평등이 규범인 상황에서 좋은 도구로 작동한다.

사화의 정치 중에 언론은 위험하고 위태롭다. 정파들이 언론을 통해 반대파를 능멸하고 비방하는 가운데 언론 자체가 망가지고 있다. 언론은 전문적이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한때 선비처럼 굴던 언론인도 있었지만, 지금 젊은 기자들은 뜻을 세운 사족의 흉내조차 내지 않으려 한다. 더 이상 독재자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니 다행이라 자위하겠지만, 주권자를 섬기지 않는 당파적 정치인들의 손에 잡혀 칼처럼 베고 도끼처럼 써는 일이 더욱 비참하다는 것을 언론인들만 짐짓 모른 체한다.

내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가장 잔인한 도구화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법안의 모호하고 과도한 처벌 규정 때문에 그것은 조선시대 사화의 도구처럼 남용될 것이다. 시민의 인격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족 간 잔인한 복수극이 반복될 것이다. 값비싼 민사 소송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있는 자들이 약자와 빈자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제도를 남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입법을 통해 공론장을 정파적 싸움터로 제도화함으로써, 민주정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개정안을 놓고 죽자고 다투는 일이야말로 그 자체로 허무한 사족 간 참화의 일부다. 다른 중요한 개혁 사안을 팽개치고 이 사태에 매달려 있는 사실마저 그렇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