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그늘’ 국정원의 빛을 향한 염원

김선영 TV평론가
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드라마 <검은 태양>의 한 장면.

MBC 금토드라마 <검은 태양>은 국정원 최고의 현장 요원이 잃어버린 기억 속 퍼즐을 맞춰가며 조직 내부의 배신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첩보 액션물이다. 드라마는 중국 선양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하던 중 실종된 국정원 엘리트 요원 한지혁(남궁민)이 1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여겨볼 점은 이야기의 출발 시점이다. 지난 1년간의 기억이 삭제된 한지혁이 국정원으로 송환되던 중 도로 대형 전광판에는 이세돌 9단의 알파고 상대 첫 승 소식이 뜬다. 2016년 뉴스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특정한 시점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편의적인 설정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검은 태양>은 1년 만에 국정원에 복귀한 한지혁의 첫 행적을 통해 시대적 맥락을 한층 뚜렷이 한다. 한지혁은 제일 먼저, 순직한 국정원 요원들을 추모하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을 찾아 묵념하는 것으로 현장 복귀의 각오를 다진다. 이때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 뒤로 국정원의 원훈이 클로즈업된다.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 이는 실제로 2016년도에 새롭게 바뀐 국정원의 원훈이다.

2016년, 현실의 국정원이 원훈을 바꾼 데에는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댓글 조작 사건 등으로 위기에 처했던 배경이 깔려 있다. 잇단 사건들로 국정원 쇄신 요구가 커지자 새 원훈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검은 태양>의 주요 플롯에 녹아 들어가 있다. 기억을 잃은 국정원 요원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조직 내부의 배신자를 추적하는 전형적인 첩보 액션물로 출발한 드라마는, 차츰 이야기의 진정한 동력이 국정원의 오랜 ‘적폐’에 있음을 드러낸다.

예컨대 한지혁이 자신의 최정예팀과 중국 선양으로 파견되었던 2015년에, 드라마 속 국정원 역시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을 덮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드라마는 한지혁 팀에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꾸준히 암시한다. 한지혁이 실종 상태였던 1년 동안, 과거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는 불법 사찰 의혹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서를 쓰고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가 해킹 업무 담당자였다는 설정과 극단적 선택을 한 현장의 묘사는 같은 해 일어난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과 고스란히 겹친다.

드라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까지 주요 에피소드로 녹여낸다. 극중 탈북자 출신 1호 기자였던 정기선(김지성)은 간첩 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선양 사건 진실의 실마리를 정기선 기자가 쥐고 있음을 깨달은 한지혁은 그를 탈출시킨 뒤 정 기자가 국정원 비리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포될 당시 정 기자는, “국정원에서 군이나 정보기관 출신 탈북자들을 관리하면서 지저분한 일들을 시킨다는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던 중이었다. <검은 태양>은 이외에도 국정원의 청와대 내각 인사 관여, 언론 통제 등 국정원의 “더러운 치부”를 작품 곳곳에 담아내고 있다.

2016년 현실에서 원훈을 바꾸며 이미지 쇄신을 꾀했던 국정원은 같은 해 말 국정농단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부패한 정권에 협조한 대표적인 ‘적폐 집단’으로 비판받고 새 정부의 개혁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검은 태양>은 국정원의 무능과 부패가 정점에 달했던 2016년의 현실을 배경으로,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과 개혁에 대한 열망을 드라마적으로 승화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검은 태양>이 국정원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제작됐다는 사실과 그 방영 시점은 주의 깊게 볼 만하다.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은 국정원은 오랜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바 있다. 이는 지난 6월 새로 바뀐 원훈에도 드러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 국정원은 새 원훈에 최초로 ‘국민’이라는 단어를 쓰며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을 다시 강조했다.

그리하여 국정원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제작된 <검은 태양>이 2016년의 시점에만 머문다면, 자칫 현재 국정원의 이미지 변신을 홍보한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도 부패한 권력기관에 대한 <검은 태양>의 비판의식은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읽힐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전개를 주목하는 이유다. 현재의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개혁 의지의 진정성은 원훈이 아니라 실천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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