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정치’는 정녕 허무맹랑할까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구호를 입에 올리던 때가 있었다. ‘상상력’이라는 단어로 대안정책을 제기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그런 말들을 잘 쓰지 않는다. ‘다른 세계’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말로, ‘상상력’은 허무맹랑하다는 말로 대체된 지 오래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얼마 전 베를린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에 그 사라진 말들이 모처럼 생각났다. 3000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민간업체들의 부동산 총 24만채를 몰수해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담은 주민투표를 베를린 시민들이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는 소식. 베를린에만 주택 11만채를 보유한 기업의 이름을 딴, 이른바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의 중간결과다. 주택 몰수라니, 그 급진적 상상력에 놀랄 수밖에. 주민투표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베를린 의회로 공이 넘어갔다지만, 어쨌거나 투표결과는 상당한 정치적 압력이 될 터다.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은 ‘사라진 말들’로 구성돼 있다. 자본은 자신들의 몫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기성정치는 자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었지만 베를린 시민들도 그 결탁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싶은 ‘다른 세계’를 마음껏 상상했고, 그 세계를 직접 이끌어내기로 결정했다.

2018년부터 주민투표를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됐다. ‘미친 임대료와 축출에 반대하는 공동 시위’라는 이름으로 꾸준했던 운동은 2019년 11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베를린 시정부가 5년간 임대료를 동결하는 법안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올해 4월 독일 헌법재판소가 이 법안을 무효화하는 판결을 냈고,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주민투표 발의 참여자가 빠르게 늘어나 올 6월 베를린 인구의 10% 수준인 약 35만명에 도달했다. 운동은 3년간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주목할 부분은 역시 자본주의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사적 소유를 한껏 침범하는 ‘상상력’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런 제안은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텐데, 베를린 시민들은 그렇게 했고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제안자들에게도 좀 허무맹랑한 제안이었는지, 처음부터 이렇게 급진적으로 주장한 게 아니다. 2015년경에도 주거문제와 관련한 주민투표 운동이 있었는데, 단지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건설 확대’를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베를린 시정부가 임대료 상한제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임대료는 계속 올랐다. 목표 달성에 실패한 베를린 시민들은 성과를 위해 더 온건한 대안을 모색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길을 택했다. 오늘의 성과는 그 결과다. 더 현실적이고 온건해지는 길이 아니라, 더 과감하게 상상하는 길이 확률이 높았던 거다.

상상력의 정치는 하나의 상상이 곧잘 또 다른 상상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근 베를린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또 발의했단다. 베를린 중심부에 자동차가 진입할 수 없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자동차가 사라진 도로를 자전거로 채워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다. 여기도 물론 역사가 있는데, 2016년경 시민단체들이 ‘자전거 도로 확충’을 주장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이제 ‘자동차 금지’라는 급진적인 상상력으로 확장된 주민투표 운동은 이미 5만명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현실주의 정치가 갈 수 없는 길을 상상력의 정치는 거침없이 간다.

여기서 주택 몰수와 자동차 금지를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적 조건들과 실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도 아니다. 독일이 했으니 무조건 훌륭하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정책가나 정치인도 아닌 보통의 시민들이 먼저 상상력을 제한하고 현실적 조건에 얽매이는 지금 상황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드는 데 정말 보탬이 되고 있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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