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를 읽으며 생각한 것들

신예슬 음악평론가

다섯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오선보 위에 놓인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음표와 쉼표, 그리고 온갖 표현을 지시하는 기호들이 가득한 문서. 오랜 시간 나는 서양음악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을 때마다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음악을 여러 번 곱씹듯 들었다. 악보는 내게 그 음악의 내부 질서와 핵심 정보를 담고 있는 건축도면 같았다. 그 안에서 선율과 화성, 리듬을 분석하고, 그에 내재한 이론적 질서와 구조, 숨은 힌트 같은 부분을 찾아가는 일은 분명 즐거웠다. 서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오선보 안에 숨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악보를 통해 음악이론을 배워가는 과정을 멈추지 않았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근현대 서양음악의 악보를 살펴본 후부터였다. 20세기에 등장한 낯선 악보들은 내 머릿속에 형성된 단정한 이론체계를 흐트러트렸다. 예컨대 음표 위에 ×표시가 자리하거나, 박자표와 마디선이 사라지거나, 혹은 오선보나 음자리표 없이 직선과 곡선,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같은 도형만 그려져 있는 형태였다. 무언가를 지시하는 말로만 가득한 악보도 있었다. ‘왕꿈틀이’ 젤리처럼 각양각색으로 어떤 덩어리만을 그려놓은 악보도 있었다. 이것이 미니멀리즘 회화인지 악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례도 여럿이었다. 여전히 나는 악보를 펼쳐놓고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당혹스러웠다. 서서히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걸 어떻게 분석하지? 이 음악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뭐지?

여러 악보를 살펴볼수록 더 분명해진 건 악보가 보여주는 것이 ‘소리의 정보’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거기엔 창작자가 음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뿐 아니라 그 기록체계를 사용하는 음악문화가 중시하는 가치가 짙게 배어 있었다. 오선보를 중심으로 설계된 전통적인 서양음악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나야 할 음향을 ‘음’이라는 정보를 중심으로 적어냈다. 그 과정에서 음들의 수평적 흐름이 선율로 인지되고, 수직적 동시가 화성으로 인지됐다. 자연스레 화성법과 대위법 같은 이론들도 하나둘씩 형성되고 정교화됐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러 동시대 음악에서 이런 논리들은 꽤 무력해졌을 뿐만 아니라 악보의 존재감도 점점 흐려졌다. 어떤 음악들에서 음의 흐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리의 색채, 소리의 압력, 소리의 방향, 소리가 울리는 공간, 빠르게 전환되는 형식, 음악가의 몸짓, 성악가의 발성법, 듣는 자의 태도였다. 음이 아니라 소리가 중심에 놓이는 음악적 체계, 시간과 더불어 공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음악 환경, 소리만큼 음악가의 몸에 집중해야 하는 관람 방식 등, 동시대에는 기존 음악의 관념으로는 다 서술할 수 없는 사례들이 산재했다.

서양이 아닌 다른 전통의 논리와 문법들, 공연에 가까운 음악, 구성된 소리에 가까운 음악, 신체로부터 출발하는 음악, 디지털적 논리로부터 출발하는 음악 등, 제각각의 논리를 지닌 음악은 각자의 영역을 일궈오고 있었다. 이들을 오선보에 기록할 수 있을까, 선율과 리듬과 화성을 분석해볼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시대의 풍경들을 살펴보며, 여기에 꼭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기록 방식과 사유 체계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내가 악보를 탐독해온 것은, 그 안에서 음악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악보를 파헤치는 일을 멈춘 채, 동시대적 음악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살펴보고 체득해야 할지를 추적하고 있다. 내가 공부해온 서양음악 이론서들의 첫 장에는 언제나 악보의 기호를 설명하는 도판들과 함께 음과 음계, 음정에 대한 설명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런 동시대적인 관점을 담아 쓰인 음악이론서의 첫 장에 ‘음’이라는 개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놓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나둘씩 다른 방식으로 쌓여나갈 음악이론은 어떤 모양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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