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과 사이다

최민영 경제부장

인도 북부 러크나우에 있는 ‘바라 이맘바라’는 1784년 대흉작에 고통받던 백성들을 위해 공공일자리를 제공하려 아와드의 왕 아사프 우드 다울라가 벌인 당대의 ‘뉴딜 사업’이었다. 용도가 뚜렷하지 않은 목적의 이 거대 건축물은 완공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는데, “낮에는 백성들이 건물을 짓고, 밤에는 지배층이 건물을 다시 부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흉작으로 역시 형편이 어려워진 귀족계급들이 일할 때는 어두운 밤으로 이목을 가리고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브히지트 바네르지는 “도움을 줄 때는 도움받는 사람의 존엄을 최대한 지켜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보편적 메시지를 이 일화에서 끌어낸다.

최민영 경제부장

최민영 경제부장

경쟁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존엄을 지켜주는 건 중요하다. 중국판 <미생>인 드라마 <평범적영요> 속 모의투자대회에서 고졸 출신 인턴인 주인공은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투자 결정을 못하는 거라며 “기회가 된다면 당신을 돕겠다”고 스스로를 낮춰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한다. 반면 명문대 출신인 또 다른 인턴은 상대방을 몰아붙이며 선택을 강제하다시피 한다.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과장은 이 광경을 보더니 말한다. “남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잠깐은 우위를 선점할 수 있죠.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로울 게 전혀 없어요.”

요즘 온라인상에서 상대방의 존엄을 할퀴는 말과 글을 접할 때마다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과 공존하는 감각을 다뤘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디지털 기술 덕에 광범위한 사람들과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는 초연결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느 정도 스마트폰 속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납작한 존재가 됐다.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사회적 뇌 가설에 따르면 한 개인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최대치는 150명이다. 이 숫자를 넘어서는 존재를 친밀하게 느끼기는 어렵다고 한다. 특히 입장이 첨예하게 갈릴 때면 복잡하게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단순하게 ‘악마화’하고 싶은 유혹조차 받는다.

그래서 납작하게만 보이는 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격이 신성한 이유는 그것이 집합적 마나(manna)의 할당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에밀 뒤르켐의 말을 인용한다. 세속화를 넘어 사물로 전락하는 인간을 복원하기 위해 종교의 감각을 빌리는 것이다. 은하수의 한 조각인 별처럼, 사회집단의 신성함을 나눠받은 한 사람의 영혼은 ‘인격’으로 불리는데,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며 예를 갖추는 것은 그의 지위나 신분, 자격과 상관없이 그가 가진 신성함에 표하는 경의라고 김현경은 설명한다.

게다가 상대방의 인격을 할퀴는 비판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을 바꾸지 못한다. 비난하는 사람이나 ‘사이다’ 마신 듯 통쾌하고 시원할 뿐, 비난받는 사람이 보이는 일차적인 반응은 대부분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자기방어뿐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이를 ‘변화의 역설’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때만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이다. 비난받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바뀌는 건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 당연한 일이다. 임상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는 “우리는 불확실성보다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문제 그 자체(이며) 문제를 잃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이해관계가 전례 없이 다변화되고, 온라인의 사용자 자기중심적인 알고리즘이 민주주의의 풍경을 바꾼 상황에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구체적인 경제공약이 발표되면 여야 두 후보가 그리는 한국 경제의 미래상이 뚜렷해지고, 지금껏 과거 중심이었던 논의의 초점도 보다 미래에 맞춰지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저탄소 전략, 미·중 경쟁구도 심화를 비롯한 큰 틀의 과제에다 가계부채 폭증, 자산격차 확대와 양극화 심화, 저출생·고령화를 비롯해 긴 호흡으로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할 일들이 산적했고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있다. ‘사이다’만 마시다가는 위벽이 상하고 필요한 영양 공급도 제때 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이번 대선을 통해 슬기롭게 한 단계 또 성장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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