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에게 검찰의 바깥은 없다

정제혁 사회부장

검사 윤석열은 정치인처럼 말했다. 2013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에 대한 외압을 폭로하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말씀드리겠다”고 한 것이 그렇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별검사팀 수사팀장에 임명된 뒤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고 한 것이 그렇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2012년 11월15일 2200억원 상당의 기업어음을 사기 발행한 혐의로 구자원 LIG그룹 회장 일가를 기소했다. 윤석열 당시 특수1부장이 브리핑에서 “금융시장에 대한 폭탄투척 행위”라며 불을 뿜던 모습이 기억난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 체제를 거치면서 검찰의 공소장에 격문투의 표현이 부쩍 늘었다는 평가가 있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산저축은행을 수사하던 2011년 6월3일 저녁, 우병우 수사기획관, 노승권 중수1과장, 윤석열 중수2과장, 윤대진 검사가 서울 서초구의 한 호프집에서 대검 출입기자 10여명과 마주 앉았다. 대형 수사가 한창 굴러가는 와중에 핵심 수사 검사들이 기자들과 집단으로 술자리를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치권의 대검 중수부 폐지 움직임이 무르익을 때였다. 술자리에서 “중수부를 폐지한다는 건 수사하지 말라는 얘기 아니냐”, “수사를 중단하겠다”는 검사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이 일은 ‘대검 중수부 파업’ ‘대검 중수부 반발’이라는 표제로 대서특필됐다. 중수부 폐지를 막으려고 소속 검사들이 수사를 볼모로 정치적 기동을 한 것이다.

2012년 12월 대검 중수부 폐지 문제로 한상대 검찰총장과 최재경 중수부장이 충돌했다. 이른바 ‘검난’이었다. 검찰 안팎에서 신망을 크게 잃은 한 총장이 국면을 돌파하려고 중수부 폐지 카드를 꺼냈으나 최 중수부장이 반대했다. 그러자 한 총장은 다른 구실을 잡아 최 중수부장을 몰아내려 했고, 최 중수부장이 여기에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검찰은 아수라장이 됐다. 최 중수부장 편에 선 검사들은 대검의 공식 공보채널에 맞서 별도 공보채널을 가동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검사들이 언론사를 나눠 맡아 ‘항명파’의 입장을 전했다. 당시 특수1부장이 윤석열이었다. 항명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시시각각 대세를 장악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권재진 당시 법무부 장관마저 등을 돌리면서 한 총장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대검 대변인에게 “이제 우리 둘밖에 안 남았다”고 푸념하던 한 총장은 며칠 뒤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검찰 내부 권력투쟁에서 항명파가 완승을 거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검사 윤석열은 ‘정치적’이었다. 그의 정치적 기질이 특정 시기, 특정 사안과 맞물려 사람들이 선 자리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보였을 따름이다. 경선을 목전에 두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는 식의 원칙론적 소구는 맥이 없고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한 걸까. 윤석열은 지난 19일 부산해운대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검찰총장 2년을 저 혼자 민주당하고 싸운 사람”이라며 “총장으로서 민주당의 무도한 정치하고 단기필마로 싸웠다”고 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한 ‘전두환 옹호’ 발언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지만, 국민의힘이 죽을 쑬 때 자신이 ‘1인 야당’ 역할을 했다는 이 발언은 매우 놀랍다. 검찰총장으로서 공공연히 정치행위를 했다는 걸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운 것이다.

‘정치적 기질이 강한 검사 윤석열’이 ‘검사 기질이 강한 정치인 윤석열’로 단순히 위치를 바꿨을 뿐 둘 사이에는 아무런 실존적 차이가 없다. 그 변화에는 도약도, 질적 전환도 없다. 배경이 검사일 때는 정치적 기질이, 정치인일 때는 검사의 기질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검사 때 정치인처럼 말한 윤석열은 정치인이 된 지금은 검사처럼 말한다. 윤석열의 실언이 유독 잦은 것, 실언에 대한 대응이 서툰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도마에 오르는 정치인과 달리 특수부 검사들은 극단적인 정보의 비대칭 속에 언론과의 관계에서 ‘슈퍼 갑’의 지위를 누렸다. 수사 정보를 선택적으로 주는 검사와 그것을 어떻게든 받아야 하는 언론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일방적, 일방향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비평적 반응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고 했다. 이들의 경구에 빗대 말하자면 윤석열에게 ‘검찰의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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