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김승희 시인
[김승희의 시심 연심] 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모두의 피아노
스트리트 피아노
손열음이나 조성진이 아니어도
쇼팽이나 모차르트 곡이 아니어도
아무나 자유롭게 아무거나 칠 수 있는 피아노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에
얼굴이 오이장아찌 같은 행인들이
잠시 걸음을 멈춘다
진주빛 피아노, 남색 피아노
모두 바다에서 나온 색인데
누구나 칠 수 있고
아무나 들을 수 있는 피아노

환자들이 물가에 와서 기다리다가
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아
물결이 동(動)할 때
연못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베데스다 연못가
찬란한 물결과 빠른 프레스토가 환하게
빛을 뿌린다

- 신작시 <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전문

새해인데도 하늘은 어둡고 도시의 겨울 풍경은 음산하다. 당나귀가 물 먹은 솜이불을 지고 가는 것처럼 우울을 질질 끌고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다가 코로나19 임시선별검사소 앞에 길게 늘어선 인파를 보았다. 한파 속에서 떨고 있는 얼굴들이 소금과 식초 물에 시퍼렇게 절여진 오이장아찌처럼 아프게 보인다. 다들 마스크까지 꽁꽁 쓰고 있으니 무척 기괴한 모습! 추워서 지하 쇼핑몰을 통해서 역으로 가려고 지하로 들어갔다.

김승희 시인

김승희 시인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 소리는 코로나 우울증에 걸린 듯 무겁게 걷고 있던 행인들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활짝 깼다. 한 청년이, 어느 피아노 회사에서 ‘모두의 피아노’라고 명명해서 시민에게(?) 기증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빛나는 피아노 소품곡. 다음은 ‘민족의 쌀’이라는 아리랑을 엄청 빠르게 연주했다. 갑자기 찬란한 힘과 속력이 몸 안에 감돌았다. 벽돌같이 무거웠던 마음에 생명의 영롱한 활기가 피어났다.

닫힌 공간 안에서 엔트로피가 오래 계속되면 반드시 에너지의 타락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의 타락을 막아주는 것은 그처럼 작은 한순간의 것일 수 있다. 한 소절의 모차르트, 한 토막의 아리랑일 수 있다. 예전에 코소보 공습 직후, 폭격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광장에서 백발의 늙은 할머니가 베토벤 곡을 즉석연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베를린 장벽이 열리자 그동안 분단의 장벽을 넘다가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장벽 아래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했던 세기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떠올랐다. 그렇게 거리의 음악은 모두의 불안과 슬픔을 위로해 준다. 위안을 건네준다. 온전한 회복에 대한 그리움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런 것을 문화의 힘이라 부를 것이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가 “모차르트가 없는 세계는 소크라테스가 없는 세계보다 훨씬 더 초라할 것 같다”는 말을 했겠지.

지금 인류는 코로나 우울증 속에 허우적대며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치유의 기적을 그리워하고 있는 환자의 막막한 심정이다. 무기력하고 곧 침몰할 것만 같다. 희망의 동(動)함이 없다. 물이 동할 때 물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성경 속 전설의 연못가에서처럼 우리의 마음에 간절한 사랑의 물결이 생생하게 동(動)할 때 절망과 우울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인가? 문자나 e메일의 끝에 자주 쓰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그 한마디 말. 돌연 들려오던 반짝반짝 빛나는 모차르트와 격하게 빠른 아리랑 곡조에서 오랜만에 기운생동이란 말의 시원함을 느꼈다. 코로나 시국에 그 한마디 말의 힘이 그렇게 그리웠었나 보다. 피아노를 치던 청년은 곡을 마치고 일어나 조용히 사라졌지만 갑작스러운 피아노 소리가 만들었던 그 마음의 파문, 격정적인 생명의 무늬는 ‘기운생동’이란 그리운 단어로 나의 가슴에 영롱하게 살아 있다. 새해 달력 위에 기운생동하는 날들이 반짝반짝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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