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친구의 이야기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우크라이나 친구의 이야기

지난주에 잘 아는 우크라이나 친구와 통화를 했다. 국제정치학과 역사사회학을 공부하여 스위스와 프랑스를 오가며 연구자의 길을 가는 이이다. 이 지면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이 전쟁에 대해 국제정치학과 지정학, 그리고 추상적 도덕 및 규범과 평화라는 관점의 이야기들은 사방에 넘쳐나지만, 막상 우크라이나인 본인들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이다.

우크라 친구 얘기 듣고
닮은꼴의 우리 상황에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긴다

우리 지배 엘리트들 또한
자기들 일파 배만 불리는
공룡이 된 건 아닐까?
대한민국의 우리들은
암흑과 절망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자유로운가?
신냉전 상황에서
7000만의 안녕을 실현할
국가를 가지고 있을까?

코로나가 무서워도
꼭 투표장으로 가야겠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우리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리의 복잡한 운명과 상황을 모두 뼈저리게 알고 있다. 몽골, 폴란드, 오스트리아,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누적된 말로 다 못할 처절한 역사, 가장 비옥한 토지와 엄청난 부존 자원을 가진 지리적 조건, 서방과 러시아와 아시아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상황, 미묘하게 얽힌 경제와 교역의 조건 등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러시아나 서방이나 어느 한쪽에 그냥 기대는 식으로는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된 이후 나타난 사태는 이러한 복잡미묘한 우리의 대외적 조건을 악랄하게 이용하여 각자 자기들 일족의 배만 채운 지배 계층의 작태였다. 러시아에 기대어 엄청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악당 재벌들과 그 한 몸인 정치인들,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악용하여 기억하기도 싫은 스탈린·히틀러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집권한 세력은 (신)나치즘의 수사를 남발하였고, 그러면서도 자기들 세력의 부와 권력을 챙기기에만 바쁜 행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기빈이는 아는지? 이 나라는 “암흑과 거짓말과 폭력과 절망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절망, 이놈이 싫어 저놈을 밀어도, 저놈이 싫어 이놈을 밀어도 하나도 바뀌지 않으며 한숨과 체념에 절어가는 나의 인생과 아이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절망을?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이를 참지 못한 젊은이들 중심으로, 차라리 유럽연합에 가입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러시아를 적국으로 돌리자는 것도 아니요, 서방을 무조건 추종하자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유럽연합이라는 절차를 이 지긋지긋한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 “밝고 투명하고 이성과 말이 통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방편으로 활용하자”는 게 우리의 뜻이었다. 이것이 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 시위 사태로 나타난 우리의 민심이다. 러시아건 서방이건, 먼저 정치개혁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민주적 합의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 구조가 만들어지면, 이를 발판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과 경제개혁을 해나가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와 서방과 얽힌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가려 했던 것이다. 이 복잡한 대외적 문제를 지배 엘리트에게 무조건 일임했다가 벌어진 상황을 겪었기에, 우리는 이를 우리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하는 방식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통해 하나씩 풀기를 원했고, 그를 통해 가깝게는 우리 나라의 안전, 나아가 동유럽과 세계 질서의 평화와 안녕에 기여하는 역할을 주체적으로 하고 싶었다.

‘우크라 국민국가’ 간절한 소망 생겨

나도 안다. 지금의 젤렌스키 대통령의 자질과 역량을 두고 말이 많았다는 것. 하지만 그 이전의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옛날 나치 협력자들을 찬양하며 반러시아 언행을 일삼던 자였고, 그래서 어쨌든 유대인 가계에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삼는 젤렌스키로 정권을 바꾸는 선택이 그때로는 최선이었다. 크름(크림)반도를 빼앗기고 옛 러시아 영토였던 돈바스 등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통령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전쟁이 벌어져서 무수한 이들이 희생당하는 이 상황에 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깡패들과 암살단이 휘젓는 우리 나라 정치 상황에서, 심지어 국제 용병들이 목을 치러 온다는 소식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수도에 남아 목숨을 걸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려는 정치인은 분명 처음이다. 나는 사실 반세기 전 칠레에서 극우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대통령 궁에 남아 기관총을 쏘다가 사살당했던 아옌데가 떠올랐다.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다수도, 키이우 시장도, 군복 입고 총을 들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나도 안다. 반러시아파 전 대통령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잽싸게 귀국하여 자기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유튜브 동영상과 매체의 보도가 TV 방송 제작자인 젤렌스키의 능숙한 하이브리드 전쟁 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국과 유럽 나라들은 국제적 세력 균형의 현상유지를 심하게 교란할 만한 실질적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며,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러시아가 결국 흑해 주변과 오데사 항구까지 다 빼앗아가고 어쩌면 젤렌스키든 누구든 우리 정부를 길들이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친러시아파와 친서방파로 갈라졌던 우리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로 우리의 ‘국민국가’를 세워야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다는 점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의 아주 고전적인 ‘국민혁명’이란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정부를 세우고, 이를 도구로 하여 안으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경제 질서를, 밖으로는 분명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하여 강한 목소리를 내는 진정한 ‘공화국’을 세우고 싶다는 열망이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귀결되든, 이렇게 불붙은 열망은 결코 쉬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사실 이른바 동유럽이라는 지역은 몇백년간 서방과 러시아 사이의 장기판·바둑판이었을 뿐, 진정한 주권 국민국가가 성립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전후 처리와 국제법이라는 알량한 문서 몇 장으로 이러저리 멋대로 찢어진 국경선으로 생겨난 나라들은 있었지만(지금은 사라진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를 기억하는지?), 교과서에 나오는 똘똘 뭉친 국민들의 힘으로 버텨내고 밀고나가는 주권적 국민국가가 생겨나는 것은 서방도 러시아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동유럽에서의 진정한 ‘국민혁명’은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동유럽 국민혁명 땐 세계평화 도움

그러니 도와다오. 첫째,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싸움은 푸틴 정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지난 30년간 ‘지구화’의 이름으로 지긋지긋하게 자행되었던바, 권력과 자원과 자본을 소수의 손에 집중하면서 대다수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전 지구적 지배 엘리트들의 협잡의 질서에 파열구를 내는 싸움이다. 19세기 메테르니히의 ‘유럽 협조 체제’와 지난 30년간 서방과 러시아의 암묵적 합의에서 만들어진 동유럽의 질서가 무어가 다른지? 둘째,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유럽 나라들에서 마찬가지의 국민적 각성이 확산되어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국민국가가 형성된다면 이는 유럽 질서는 물론 세계 평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패권 싸움이 극에 달했던 유럽 대륙에 그나마 평화가 유지됐던 것은 바다 바깥의 영국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편을 바꾸면서 세력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유럽 나라들이 21세기의 인류 평화를 위해 그런 기여를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최대의 핵무장 세력인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그런 독립적인 주권 국가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인류 전체의 이익이 아닐까?

창피하게도 엘베강 동쪽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논평도 판단도 할 수가 없다. 잘 아는 분들의 논평과 질정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여러 고민이 생긴다. 우크라이나 못지않게 복잡한 조건에 있는 한반도 남단에 살고 있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우리 지배 엘리트들 또한 지난 30년간의 ‘지구화’라는 조건을 쥬라기 공원처럼 즐기면서 자기들 일파의 배만 불리는 공룡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대한민국의 우리들은 과연 “암흑과 거짓말과 폭력과 절망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자유로운가?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적국이 쳐들어올 때 정말로 우리와 함께 방공호로 들어갈 지도자들은 얼마나 될까?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려는 상황에서 5천만 아니 7천만의 안녕과 희망을 모아내고 실현할 수 있는 국가를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 코로나가 무서워도 꼭 투표장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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