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꿈꾸자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꿈꾸자

민주주의는 이제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꿈꿀 때가 되었다. 생시몽과 하벨이 꿈꾸었던 진정한 산업사회의 정치를 만들어갈 때가 무르익었다
대의제 민주주의제를 뒤엎자는 것도, 현존 정당들을 무시하자는 말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를 놓고서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이야기할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 장을 중심으로 연예기획사만도 못한 정당과 정치인을 지배해야 한다. 21세기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절박한 길이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아무리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꼭 있는 정당들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로 괴로워한 이들이 많을 줄 안다. 아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정당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 박사입네 교수입네 하는 이들이 뭐라고 하든, 정당과 민주주의는 개념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고, 또 지금 절실히 필요하며, 지금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죽음에 이른 대의제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절실히 필요한 문제이다.

1. 생시몽 “옛날 정치는 끝났다”

현대 정치학의 아버지가 마키아벨리라는 말은 크게 틀린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산업혁명과 거기에서 나온 산업사회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00년 동안의 산업사회 정치학을 주의 깊게 지켜본 이들은 사실상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치학의 아버지는 앙리 드 생시몽이라고 말한다. 그의 방대한 사상 가운데 정치와 관련된 논지는 이러하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생산자 계급과 지배 계급이 철저히 나뉘어 있었다. 농사짓고 소 기르고 물고기 잡는 평민들과, 술 먹으며 시나 짓고 혹은 사냥이나 다니는 지배 계급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때의 정치는 사실 그 불한당 지배 계급끼리 누가 정치 권력을 먹느냐라는 싸움이었다. 왕이니 뭐니 있지만, 사실은 그 뒤에 도사린 집단 어디가 먹느냐의 싸움이 정치였다. 이를 생시몽은 ‘권력 정치’라고 불렀다.

하지만 산업사회는 전혀 다른 사회이다. 공장과 인터넷과 고속철도가 다니는 사회에서는 경제 활동과 사회 전체가 조화롭게 결합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필요한 정치는 그 한가한 무리들의 ‘권력 정치’가 아니라, 산업과 경제와 사회를 가장 합리적으로 결합하여 자유, 평등, 사랑이 꽃피우는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에 생시몽은 이제 옛날의 정치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자기 일신과 피붙이의 부귀영화가 해결되어 껄렁거리며 한 자리 먹으려는 자들이 정치를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한 정치는 왕과 귀족들이 다스리는 농경시대의 정치일 뿐, 산업사회(이 또한 생시몽이 만든 말이다)의 정치는 숨가쁘게 돌아가며 또 숨가쁘게 변화해가는 세상을 가장 잘 아는 산업 세력이 인간과 사회와 산업을 조화시키도록 과학과 공학과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하는 토론의 장으로 꽃피워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누가 권력을 먹느냐는 ‘권력 정치’가 아니라, 기계 문명의 도전 앞에서 인간 사회를 지켜나갈 절박한 합리적 정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생시몽이 작고한 것은 2025년이 아니라 1825년이다.

2. 하벨의 ‘열린 정치 플랫폼’ 실험

생시몽이 꿈꾼 대로 권력 가지고 개싸움을 벌이는 정치가 아니라 “가장 숫자가 많고 가장 어려운 위치에 처한 자들”의 지위를 살피고 개선하는 정치는 시도된 적이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불한당’들의 모임인 정당들 중 누구를 뽑느냐가 아니라, 산업사회의 다양한 현장에 맞부닥친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함께 토론을 벌이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정치, 즉 정당 없는 산업 민주주의가 시도된 경우가 있다. 20세기 중반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아주 가까운 예이지만 정치로 국한해서 보자면 더 재미있는 예가 따로 있다. 조금 의외일 수 있으나, 옛날 공산주의의 질곡 아래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었다.

1968년 프라하에서는 공산 독재에 반대하는 민중 혁명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에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공산당을 완전히 털어버려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정치 플랫폼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는 어차피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이니, 그 공산당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과 민주집중제라는 조직 원리를 제거해버린다면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의 상황을 있는 대로 털어놓고 또 자신의 의견과 사회적 구상을 토론할 수 있는 열린 포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산업사회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시민들이 겪는 고충을 정당 게다가 공산당 따위의 정당이 무얼 알겠는가? 이들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어렵고 어떻게 생활세계를 바꾸어갔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이 표출될 장이 있는가? 어차피 다른 정당도 없는 판이니 공산당을 싹싹 털어온 국민들의 ‘정치 플랫폼’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충분히 나올 법했다.

1989년 체코의 공산 독재를 털어버리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바츨라프 하벨이 꿈꾸었던 정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극소수의 지배 엘리트들이 무리를 지어 정당의 허울을 둘러쓰고 권력 싸움이나 벌이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 또한 ‘정당 지배 체제(partocracy)’라고 부르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던 시민들의 포럼이 그대로 발전하여 도시, 농촌, 부자, 빈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국내외의 상황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하벨은 고령과 폐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떠밀려 2003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다 2011년에 작고하였다.

3. 그런데 우리는 ‘권력 정치’만 난무

한국의 정당은 선거를 보며 뛰는 연예기획사라는 조롱이 있지만, 이는 전혀 틀린 이야기이며 정당정치라는 점에서 보면 상황을 너무 미화하는 이야기이다. 백몇십 명 혹은 그 이하 숫자의 국회의원들이 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의 재선 가능성과 일신의 영달만을 보면서 뛰는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은 연예기획사의 지휘를 따르는 연예인들과 달리, 정당의 지휘와 통제를 거의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정당 또한 그러한 역할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옥수수와 파인애플을 잘라보면 ‘속대’가 있어서 바깥의 낱알과 과육이 거기에서 영양분을 얻으며 자라지만 지금의 정당들은 반대이다. 어떤 이념과 가치를 가지고서 그에 호응하는 사회 세력을 대변하여 세를 모으고 이를 실현하려는 이들을 의회로 보내는 교과서의 정당 모델이 아니다. ‘속대’는 텅 비어 있다. 선거에 이길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든, 무슨 짓이든 다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낱알’들이 지금 우리 대의제 민주주의의 전부이다. 정당은 이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사무실에 불과하다. 연예기획사는 고사하고, 조직폭력배 사무실도 이런 곳은 아니다. 도대체 이런저런 정치인 개인들을 뛰어넘은 정당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가?

생시몽과 하벨의 말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2022년의 한국 사회에 아주 절실한 이야기이다. 자기 일신의 영달을 다 이루어 놓고서 더 나아가 한자리 해보려고 나서려는 자들의 ‘권력 정치’만 난무할 뿐이다. 하지만 목이 부러질 정도의 속도로 성장한 한국 사회는 곳곳에서 극심한 성장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은 대다수의 약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주택과 소득과 돌봄과 같이 모두가 겪는 문제들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소수자 문제들이 절실한 상황이건만, 현존의 정당정치는 케이블TV에나 나올 30년 전 이야기로 선거를 때워가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이제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꿈꿀 때가 되었다. 배지나 단체장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기껏 1만명 남짓이 휘두르는 정치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고통과 희망과 절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정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생시몽과 하벨이 꿈꾸었던 진정한 산업사회의 정치를 만들어갈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제를 뒤엎자는 것도, 현존하는 정당들을 무시하자는 말도 아니다. 그들이 외면하는 우리의 무수한 절실한 이야기들을 만드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시민사회’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지만 지금은 지적·도덕적 권위를 잃은 상태이다. 다시 그런 장을 만든다고 해도 또 이런저런 집단들과 거기에 줄을 댄 정치 세력들의 작업이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장 자체가 없는 상태이다. 누가 어떤 세력이 어떻게 이용해 먹든 그에 개의치 말고 2022년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놓고서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기탄없이 자기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할 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21세기의 정치는 이러한 장이 중심이 되어 그 연예기획사만도 못한 정당들 아니 그 이름을 둘러싼 정치인들을 지배해야 한다. 21세기 민주주의가 천박한 포퓰리즘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유일한 절박한 길이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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