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이 많은 배우’ 이어령 선생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사물에 빗댄 인물평으로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는 것 중에 하나는 연극배우 박정자에 관한 평이다. 오래전 일본 공연 동행 취재를 갔을 때, <그 여자, 억척어멈>을 본 한 일본 연극평론가가 그를 “서랍이 많은 배우다”라고 해 깊게 공감한 적이 있다.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여기서 ‘서랍’은 연기자로서의 표현력과 재능 등을 함축한 말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통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배우의 고된 삶을 그린 모노드라마에서 박씨는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가리지 않고 다재다능한 면모를 뽐냈다. 여러 서랍에 감춰둔 신기한 보물들이 마구 쏟아져나와 관객을 매혹시켰으니, 그의 연기를 두고 서랍이 많다는 표현을 능가하는 헌사를 찾긴 어려웠을 것 같다.

세상이란 인생극장에서 이처럼 서랍이 많은 배우를 꼽으라면 최근 작고한 이어령 선생만 한 분도 없다. 선생은 직업인의 영역으로 보면 문학평론가, 교수, 언론인, 문화행정가, 저술가 등에 해당하지만 이런 다양성이 선생의 서랍 많은 인생의 진가를 드러내진 못한다. 직업적인 외피를 걷어내고 들어가보면 만나게 되는 ‘서랍 속 내용물’에 주목해야 제대로 된 평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선생과의 개인적인 인연은 정말 조 한 알도 안 될 만큼 미미하다. 선생이 고문으로 있던 신문사 문화부 기자일 때, 서너 번 ‘불려가’ 몇 시간씩 쉼 없이 쏟아내는 주옥같은 말씀을 그때는 겨우겨우 받아냈던 기억밖에 없다. 당시엔 나의 협량한 지식을 탓하기 전에 그런 상황이 짜증 나고 싫증 났던 게 사실이다. 지나고 보니, 그런 산지식을 긍정적으로 흡수하여 새기지 못한 어린 치기가 아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미친 선생의 두터운 영향력에서 보듯이, 인문학도인 나에게도 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은 존재감은 컸던 것 같다. 선생의 죽음을 계기로 불현듯이 떠오르는 그의 말과 생각, 사상 등을 보며 참 서랍이 많은 배우였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 다양한 사람들이 그를 ‘시대의 어른’으로 평가하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특히 선생이 평생 갈고 닦은 문화라는 터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창발적인 기획과 아이디어, 그리고 문화와 예술인에 대한 자세와 태도는 나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이미 잘 알려진 사례들이긴 하지만, 다양한 직업인으로서의 면모가 아닌 선생의 서랍 속 내용물을 통해 ‘감히’ 나름 평가하여 닮고 싶은 면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당대 최고 지성으로서의 면모다. 이는 언론에서 수없이 언급한 바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다. 지성인은 좀 더 공적이면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지식인은 많지만 지성인은 드물다고 한다. 많은 이들로부터 폭넓게 받는 ‘한국의 대표 지성’이라는 평가는 그래서 더욱 도드라지고 소중하다.

사상가적인 면모 또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나는 일찍이 일본과 일본인을 분석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사상가 이어령’을 읽었다. 일본인의 축소지향 성향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는데, 루스 베니딕트의 <국화와 칼>과 비교하여 읽으면서 일본의 심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안의 세계’에 집중하는 축소지향의 일본이 확대지향이 될 때 우려되는 점에 대한 언급은 우리 아픈 역사 경험에서 되새겨야할 대목이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선지자로서의 면모다. 이미 15년 전 선생은 <디지로그>를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세상’을 예견했다. 제4차 산업혁명 같은 거창한 구호 이전에 나온 그의 탁견은 지금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현실화 과정에 있다. 여러 주장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있고 미래 지향적인 현안으로 보는 것은 실현실과 가상현실을 접목한 ‘확장현실(XR)’ 분야다. 가상을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아날로그 현장에서 느끼는 ‘현장의 감성’(현존성)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기존 예술의 확장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목은 그늘도 넓다. 문화선진국 진입 문턱에서 더없이 필요한 것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화수분처럼 뿜어낸 한 어른의 죽음에 아쉬움과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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