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대중화의 과제 던지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BL 대중화의 과제 던지다

2022년 2분기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올해 첫 분기 최고 화제작을 꼽는다면 단연 왓챠의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사진)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돼 글로벌 시청 순위 상위권을 차지한 <지금 우리 학교는>(넷플릭스), <소년심판>(넷플릭스),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사내 맞선>(SBS) 등도 눈길을 끈 작품이지만, <시맨틱 에러>는 화제성에 더해 국내 드라마 장르사에 신기원을 연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캠퍼스를 배경으로 상극관계인 두 청춘의 로맨스를 그린 <시맨틱 에러>는 BL(Boy’s Love) 장르에 속한다. 남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BL은 소위 ‘음지문화’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마이너 장르였다.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한다는 것도 한 요인이지만, 여성의 욕망을 솔직하게 투영하는 ‘여성향’ 장르에 대한 폄하와 자조도 작용했다. 오랫동안 그늘에 머물러 있던 BL은 유통 플랫폼의 성장과 더불어 비로소 상업적 가능성을 새삼 인정받기 시작한다.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동명 원작은 국내 BL 시장의 성장을 주도해온 콘텐츠 플랫폼 리디북스에서 연재를 시작해 2018년 리디북스 BL 부문 대상을 받은 수작이다. 웹툰, 애니메이션, 오디오 드라마 등의 각색에서도 잇단 성공을 거둬 BL계의 슈퍼 IP로도 평가받는다. 멀티 유즈의 최종 관문이자 가장 고난도 작업인 실사 영상화는 왓챠가 맡았다. 최근 1~2년 사이 여러 플랫폼이 저예산 국산 BL 드라마들을 선보였지만, 점유율 상위 OTT 업체에서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한 사례는 없었기에 방영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 같은 배경 안에서 탄생한 <시맨틱 에러>는 말하자면 국내 BL 장르의 성장 과정을 압축한 듯한 역사적 좌표 위에 놓인 작품이다.

지난 2월16일 첫 방영된 드라마는 공개 즉시 왓챠 시청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사사건건 충돌하던 주인공들의 감정이 혼란스러운 격정으로 뒤바뀌는 4회 이후에는 한층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각종 화제성 지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월 초, 영화 주간지 ‘씨네21’이 두 주연 배우인 박서함, 박재찬을 표지 모델로 내세워 이 작품과 함께 국내 BL 장르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것은 비평적 측면에서도 주목받는다는 증표다. <시맨틱 에러>는 그렇게 방영 한 달 만에 국내 드라마 장르사에 BL이라는 새 카테고리를 각인시킨 획기적 작품이 됐다.

그동안 BL 드라마의 대중화를 막은 진입장벽은 사실 소재에 대한 편견보다 조악한 완성도에 있었다. 저예산의 한계와 장르에 대한 낮은 이해도 탓이다. <시맨틱 에러>는 달랐다. 소위 ‘BL적 허용’이라는 변명 아래 허술한 개연성만 두드러지는 클리셰 범벅 스토리 대신 처음부터 ‘웰메이드 장르물’을 목표로 했다. <시맨틱 에러>는 두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격랑 위에 진로에 대한 고민, 불안한 인간관계 등 청춘드라마 장르의 고민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작품이다. 로맨스에서도 성적 긴장을 유발하기 위한 노골적인 ‘노림수’ 대신 잘 조율된 미장센, 조명, 함축적인 대사, 적절한 OST 등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쌓는 데 주력했다.

<시맨틱 에러>는 그동안 BL 장르에서 문제로 지적받던 윤리성에서도 성실한 태도를 보여준다. 상우(박재찬)의 첫 등장신이 필수교양과목 ‘인성’ 수업으로 시작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바람직한 인성상을 강조했던 상우의 말처럼, 드라마는 그동안 BL 장르에서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를 포함한 주변 인물을 불필요하게 도구화하던 관습들을 멀리했다. 상우를 좋아하는 지혜(김노진)는 원칙주의자인 상우와 달리 유연한 인물로 상우가 성장하도록 돕는다. 재영(박서함)의 ‘절친’ 유나(송지오)는 특유의 통찰력과 유머를 지닌 개성적인 인물이자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시맨틱 에러>의 성공은 앞으로 이 작품이 열어젖힌 드라마 장르의 새 지평에 안착할 후속 작품들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장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출발한 완성도는 기본이고, 더 나아가 이미 대중화된 이성애 로맨스 장르가 요구받아온 동시대적이고 윤리적인 고민에 대해서도 진지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