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판타지 드라마에 담긴 시대적 요구

김선영 TV평론가
드라마 <군검사 도베르만>의 한 장면.

드라마 <군검사 도베르만>의 한 장면.

월화극 시청률 1위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군검사 도베르만>(tvN)은 군 법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 <변호인>, 드라마 <무법변호사> 등의 각본을 집필하며 ‘법정물의 장인’으로 불린 윤현호 작가가 기획의도에서도 언급했듯, 법정물이 큰 인기를 끄는 국내 드라마계에서 지금껏 “군사법원이 메인 무대였던”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었다. 국가안보라는 ‘대의’ 안에서 성역화된 군대의 특수성 때문이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잇단 군 성범죄 및 사망 사건 이후 군사법원법이 개정되는 등 군대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가운데, 군 법정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드라마가 드디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군대에 오게 된 젊은 검사들이 군대의 거악과 맞서는 과정을 그리는 <군검사 도베르만>은 ‘한국 최초의 밀리터리 법정물’이라는 새 기록을 썼다.

최근 몇 년 사이, 폐쇄적인 조직사회 내부로 들어가 악습과 싸우고 개혁의 의지를 드러내는, 말하자면 ‘혁신 판타지’라 할 만한 이야기가 드라마계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군검사 도베르만>과 같이 기존에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권력기관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작품들이 늘었다. <군검사 도베르만>보다 1년 먼저 공개돼 군대 개혁 공론화에 영향을 미친 <D.P.>(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국내 드라마 중 처음으로 군무이탈체포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D.P.>는 탈영병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군 시스템의 문제를 생생하게 고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군대 못지않게 비밀스러운 어둠에 가려져 있던 국가정보원이라는 조직의 내부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본 작품도 있었다. <검은 태양>(MBC)은 그동안 첩보 액션물의 화려한 무대로 그려졌던 국정원이 아니라 부패한 정권에 협조하고 권력 유지에 급급했던 ‘적폐 집단’으로서 국정원을 냉철하게 담아냈다. 국정원 최고 요원 한지혁(남궁민)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 안에 간첩조작 사건, 댓글조작 사건, 민간인 사찰 사건 등 국정원의 무능과 부패를 보여준 실제 사건들이 하나하나 조명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지난 3월 종영된 <트레이서>(MBC, 웨이브)도 유사한 주제를 이어갔다. <트레이서>는 국정원, 검찰, 경찰과 더불어 국내 4대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국세청을 중심 배경으로 삼은 첫 작품이다. 국세청에서 온갖 지저분한 업무를 도맡아 “쓰레기 하치장”이라 불리던 조세5국에 신입팀장 황동주(임시완)가 들어온다. 자타 공인 최고의 승부사 황동주는 부패 기업을 대상으로 엄청난 세금 추징 성과를 올릴 뿐 아니라, 무력감과 타성에 젖어 있던 조세5국을 변화시켜 국세청 혁신의 중심지로 삼는다. 국세청 내의 뿌리 깊은 파벌문화, 부정청탁 관행 등의 악습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같은 경향의 출발점에는, 2016년 촛불혁명으로 나타난 개혁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법조물의 유행이 있었다. 검찰 조직 내부의 구조화된 악을 들여다본 <비밀의 숲>(tvN), 법조계 적폐를 젠더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녀의 법정>(KBS), 사법농단 사태를 예견한 <귓속말>(SBS), 신세대 판사들의 시선을 통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사법계 내부의 문제점을 들춰낸 <미스 함무라비>(JTBC) 등이 촛불혁명 이후 동시기에 잇달아 등장해 주목받은 작품들이다.

요컨대 촛불혁명으로 상징되는 사회개혁의 열망이 자기성찰적인 법조물의 유행을 시작으로 군대, 국정원 등 가장 폐쇄적이던 권력기관의 극화로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최전선에 있었던 <비밀의 숲>은 시즌2에서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논쟁을 중심 소재로 다루면서 시리즈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재확인했다. 기획 의도에는 혁신판타지 드라마들의 핵심 정신을 요약한 듯한 문장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를 쓰는 2019년에도 여러 개혁안이 여전히 논의만 되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 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는 눈과 귀가 될 수 있습니다. 완고하기 짝이 없는 제도권에 인간을 심는, 건강한 참견장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줌의 희망이 수백의 절망보다 낫다는 믿음하에, 멈추지 않고, 관망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드라마를 시작합니다.” 촛불정부라 불리던 정권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개혁의 주체는 여전히 시민들임을 환기하는 작가의 문장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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