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마라톤이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텔레비전에서 영양이 표범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보면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처럼 보인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적자생존’ 따위를 배운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인간사회도 그렇게 돌아간다고 믿는다. 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자 약육강식의 역사로 보인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권력자들이 핵폭탄에 집착하는 것도 같은 생각에서일 것이다. 국가들이 앞다퉈 무력을 증강하듯이 개인들도 저마다 좀 더 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부와 권력을 손에 넣고자 기를 쓴다. 하다못해 주먹힘이라도 세야 한다고 믿는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우리 교육 또한 이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학교교육의 기본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름 아닌 ‘필승’일 것이다. ‘홍익인간’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이고, 참고서는 오랫동안 <필승>과 <완전정복>이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수능시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입시전선은 머지않아 취업전선으로 바뀌고, 거기서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나면 또 새로운 전선이 기다린다. 복마전 같은 결혼전선은 거의 게릴라전으로 진행되지만 앞서 치른 입시전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다들 알고 있다. 승진전선도 예외가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대부분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 다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셈이다.

피를 말리는 경쟁이 아니라도 승부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지면서 몸의 컨디션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평정심을 잃으면 있는 기량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운동장에서 또 연병장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기분 좋게 한 시간을 달리는 것보다 선착순 달리기 5분이 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사실상 선착순은 집단을 통제하는 효율적인 방편일 따름이다. ‘전방 축구 골대 돌아서 선착순 열 명!’ 이 한마디에 뿔뿔이 흩어진 힘없는 개인들이 되어 저마다 저부터 살겠다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슬픈 광경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보수 언론에서는 흔히 우리 교육이 중학교 과정까지는 성공적이며 세계가 인정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주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나 수학올림피아드에서 1, 2위를 했다는 실적을 든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하위권에 머문다는 슬픈 현실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마라톤에서 초반에 죽어라 뛰어 반환 지점에서 일등을 한다고 뛰어난 마라토너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원과 과외에 익숙한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혼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조기 유학을 간 아이들이 미국에서도 학원을 다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에 죽을 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는 학원의 선행학습이나 선착순의 약발도 다해간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생기 넘치던 많은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가면 책상에 엎드려 잔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들이 느끼는 자괴감도 심각한 수준이다. 수십만명의 교사들과 수백만명의 청소년들이 서로의 시간을 죽이며 삶을 낭비하는 이 현실은 국가적 재난 상황에 가깝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속도대로 걷거나 뛸 수 있을 때 아이들과 국가의 미래도 밝아질 것이다. 걷는 아이들은 걸으면서, 뛰는 아이들은 뛰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교육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진짜 경쟁력은 그렇게 저마다 타고난 가능성이 피어날 때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경쟁심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우월감과 좌절감을 조장하면서 창의성이 자라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뭔가를 할 때보다 그 일이 좋아서 몰두할 때 더 잘할 수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흔적을 남긴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일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교육은 선착순 달리기가 아니라 걷기 또는 마라톤이다.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이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리듬대로 걷거나 뛸 수 있게, 그래서 모두가 결승점에 이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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