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순발력과 철학의 빈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미국 대통령이 옆에 서 있는 정상외교 무대에서 민망하긴 했나 보다.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 측 기자로부터 내각의 성비 불균형을 지적하는 질문을 받았으니 말이다. ‘남성 편중’ 인사 지적에 윤석열 대통령은 “장관을 예로 들면 그 직전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오지 못했다.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할 생각”이라고 했다. 사흘 뒤 국회의장단 접견 자리에서는 “제가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시야가 좁았다”며 “공직 인사에서 여성에게 과감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거나, ‘능력주의’를 표방하며 여성 할당이나 안배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기존 입장을 생각하면 긍정적인 변화다. 윤 대통령은 이틀 뒤 세 명의 장차관급 인사를 단행하며 모두 여성을 발탁했다. 오판을 인정하고 즉각 조치에 나선 점에는 박수를 보낸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이번에 내정된 후보들은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노동개혁과 함께 3대 개혁과제로 제시한 교육개혁과 연금개혁을 책임질 인사들이다. 교육·연금·노동개혁은 하나같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갈등구조가 복잡한 현안이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미래세대의 삶을 좌우할 과제들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사에서도, 국정기조에서도 개혁의 방향성과 철학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국정과제 자료집을 보면 윤석열 정부는 교육 분야에서 소프트웨어(SW)와 인공지능(AI) 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 디지털·AI 교육 강화, 대학 규제 완화 등이 담겼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이니 첨단 과학기술 강국을 지향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수십년간 교육의 영역에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고, 대입 스펙을 위해 각종 편법·탈법이 만연한 상황에서 어떻게 교육격차를 줄이고, 대학입시의 공정성을 확보하며,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할지에 대한 비전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분야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박순애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를 새 교육수장 후보로 내세운 것은 현 정부가 말하는 교육개혁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교육계 현안에 밝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에 부합하는 과학기술 전문가도 아닌 공공행정 전문가를 발탁한 것은 단지 교육분야를 비효율성을 제거할 행정 영역의 하나로 본 것이거나 여성이니까 지명한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연금개혁은 어떤가. 윤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나라 안팎의 위기와 도전은 미뤄놓은 개혁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극복하기 어렵다”며 연금개혁을 첫 번째로 꼽았다. 당연한 얘기다. 문재인 정부가 저출생 고령화를 내내 우려하면서도 연금개혁을 방치한 채 5년을 흘려버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국민연금·기초연금·공무원연금·사학연금·사적연금 등으로 나눠진 연금제도의 구조를 개혁하고, 노후소득 보장성을 강화하면서도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비견되는 난제이지만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김승희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국회의원 시절 발언이나 의정활동을 보면 이 같은 일을 맡길 적임자인지 의문이다. 상대진영을 향해 막말과 억지주장을 서슴지 않고 정치적 편향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고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합의를 도출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말이다.

노동개혁은 노동계가 우려하는 대로 노동시간 유연화와 규제 완화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여전히 한국은 세계적인 장시간 노동 국가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를 통해 주 52시간제의 취지를 허물려 한다. 시행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선 규제이고 국가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경영계 의견에 동의한다며 개정을 예고했다. 매일 현장에선 노동자가 일하다가 깔려 죽고 떨어져 죽고 끼어 죽는데도 자본·경영의 논리를 앞세운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윤 대통령의 박순애·김승희 내정자 발탁에 “순발력이 보통 아니다”라고 했다. 평생 검사로 살다 정치에 발을 들인 지 9개월 만에 대권을 거머쥔 것이나 외신 기자의 지적을 받자마자 여성 발탁에 나선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개혁이 요구되는 장기 미해결 현안들을 철학도 없이 순발력만으로 풀 순 없다. 성차별 해소 역시 보여주기식으로만 접근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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