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클래식의 르네상스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국제 콩쿠르 입상자에게도 나라에서 카퍼레이드를 해준 때가 있었다. 48년 전의 일로, 지휘자 정명훈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20세 약관의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정씨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등을 차지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쇼팽과 퀸 엘리자베스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통한다.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씨의 카퍼레이드에 얽힌 일화가 있다. 이 빅 이벤트의 기획자로 훗날 문화행정의 거목이 된 고 이종덕씨가 <공연의 탄생>에서 밝힌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공부 공연과에 있던 1973년, 모스크바에서 생각지 못한 낭보가 날아들었다.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었다. 예술의 나라 러시아에서 주최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들의 경합 무대였다. 바로 그 무대에서 실력이 쟁쟁한 서양 음악가들을 제치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청년 피아니스트가 최상의 실력을 뽐내며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이다.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나는 국장실로 달려가 ‘세계 음악계의 금메달’과도 같은 성과를 보고했다.”

순전히 기억에 의존한 회고담이어서 팩트 자체가 틀린 곳이 적잖다. 원래 1974년인 개최연도도 그렇고, ‘1등 없는 2등 입상’이라는 대목도 그렇다. 한참 지난 뒤 저자 본인도 잘못을 수정했으나, 그해 1등은 엄연히 있었다. 나중에 여러 차례 내한 공연도 펼친 소련 출신 안드레이 가브릴로프가 우승자였다.

당시 1등 없는 2등의 전설은 제대로 외신을 접하기 어려웠던 ‘철의 장막’ 냉전시대에 벌어진 해프닝이지만, 이 국제 콩쿠르의 위상을 볼 때 정씨의 입상은 지금 봐도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씨의 제안이 성사돼 귀국 후 정명훈씨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970년대 카퍼레이드는 기능올림픽 수상자 등 ‘국위선양자’들에게 국가가 마련한 최고의 경축 세리머니였다.

바야흐로 한국 클래식의 르네상스다. 여기서 르네상스는 ‘전성기’라는 의미다. 예의 3대 콩쿠르는 물론 세계적으로 저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매년 입상자들이 나오고 있다. 국제 콩쿠르 입상자 대거 배출만이 한국 클래식 전성기의 절대 지표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클래식 르네상스의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입상자에게 카퍼레이드를 해주던 정명훈식 몇몇 독주(獨走)의 시대를 벗어나 기악과 성악, 발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는 게 첫 번째 증표다.

최근 낭보의 주인공은 지난 6월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다. 대회 60년 역사상 18세 최연소 우승자 임윤찬은 경탄을 자아내는 연주력 못지않게 세상 이치에 통달한 듯한 사색의 언사로 이목을 끌었다. “우승했다고 달라진 것 없다.” 나는 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보면서 연주에만 몰입한 피아니스트가 아닌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 연기자, 즉 배우의 모습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도구 삼아 무대 위에서 지성과 감성, 의지를 균형 있게 보여주는 전인적 카리스마의 싹을 봤다.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이전의 무수한 선배 콩쿠르 입상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미래를 훨씬 기대하게 됐다.

소수의 몇몇 사람이 결코 특정 분야의 전성기를 견인할 수 없듯이 클래식 분야도 마찬가지다. 임윤찬과 조성진 등 빼어난 연주자들의 등장은 다다익선으로 좋은 일이지만 이를 떠받치는 저변이 단단할 때 르네상스는 더욱 굳건해진다. 어느 분야든 인문과 교양의 깊이는 그 분야 르네상스의 초석이다.

풍부한 인문과 교양의 시작은 좋은 글과 문장이다. 요새 클래식을 매개로 한 재기발랄하며 깊이 있는 문장가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언론과 학계, 예술가들 사이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전성기의 도래를 실감한다. 여러모로 카퍼레이드할 일은 많으나 시대가 바뀌었으니, 훌륭한 연주와 풍미한 글에 ‘좋아요’ 한 번쯤 날리면 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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