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나’, 무엇이 진짜일까

조광희 변호사

드라마 ‘안나’의 6부작 논란은
의도치 않은 고품격 퍼포먼스 돼

홍보전략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중예술과 창작자 권리는 물론
저작권 몰이해의 산물일 뿐이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6부작 드라마 <안나>가 감독이 완성한 8부작을 쿠팡이 일방적으로 편집한 것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창작자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이면을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감독의 핵심 주장은 반박될 수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쿠팡의 행위는 영상업계에서 관례로나 정서상으로나 통용될 수 없는 행동이 맞다. 법률적으로는 이런 경우를 위해 저작권법이 고안한 창작자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한 것도 당연하다.

조광희 변호사

조광희 변호사

그 와중에 쿠팡은 8부작 감독판도 공개했다. 나는 대하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는 지구력이 없어서 끝까지 보는 경우가 드물다. <왕좌의 게임> <나의 아저씨> 정도가 끝까지 본 작품이다. <안나>는 이런 습성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늦은 밤에 1화를 보고 잠들려다가, 단숨에 최종회까지 보고 새벽에 잠들었다. 6부작과 감독판을 모두 본 후, 감독판의 깊이와 가치를 인정하는 의견이 대다수였지만, 6부작의 빠른 속도감이 좋았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먼저 본 작품의 각인효과이거나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8부작을 넘겨받은 쿠팡이 6부작으로 고칠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관행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물론 작품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결정권자의 영상예술에 대한 이해가 중립적으로 말해서 매우 독특했거나 또는 다른 속사정이 있지 않나 추측해본다.

어렵지만 따뜻한 집안에서 자란 안나 역의 수지는 재능과 아름다움과 욕망을 모두 갖추었다. 뜻밖의 사건만 아니라면, 인생을 잘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수지에게 일어나서 비열하게 마무리된 사건은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그 상황에 처했다고 꼭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감독이 마련한 촘촘한 서사는 빗나간 선택을 수긍하게 만든다.

부조리와 안이한 선택으로 군색한 삶을 살아가는 수지에게 인생을 고칠 기회가 온다. 잘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부조리한 상황들과 맞물려 그렇게 흘러간다. 누군가의 문제제기만 없다면 원래 명민한 안나가 제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지위들이다.

수지에게 공인된 자격은 없지만, 실제로 해낼 역량은 있다. 그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자격’이란 무얼까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수지가 가지고자 했던 기득권자들의 자격이야말로 경제력과 관계자본과 속임수를 통하여 획득한 것들이다. 수지는 부와 학력과 권력이 기득권에 유리하게 분배되도록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일탈을 통해 상류사회로 진격한다. 우리는 그런 수지가 악녀라기보다는 모순된 사회에서 고통받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각별히 인상적인 것은 정은채씨의 연기다. 그가 연기한 상류층의 망가지고 도도한 여인은 화면을 찢고 바로 현실로 나올 듯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아마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공동체의 신뢰를 유지하려 만들어진 증표들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고착되고 기득권화될 때, 그 증표들은 사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보증해주지 않는다. 오늘도 한국을 시끄럽게 하는 하버드대 졸업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이제 그 졸업생이라면 가장 의심스럽다. 사람의 가치와 진실과 능력은 파악하기 어렵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한다.

문제는 돈과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만들어낸 것이 아주 드물게 폭로되어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신분이 맞는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민이었으면서 그것을 만들어낸 수지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격의 조작이 아니라 타고난 신분인 것이다.

드라마 <안나>는 진실과 거짓, 원본과 사본의 문제를 설득력 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놀라운 흡입력으로 보여준다. 먼저 공개된 6부작 드라마가 원본이 아니었다는 뜻밖의 자기부정은 의도치 않은 고품격 퍼포먼스가 되었다. 만일 이것이 홍보전략이었다면, 예술의 경지라고 부를 만하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로는 대중예술과 창작자의 권리 그리고 저작권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일 뿐이다. 감독판 <안나>가 논란을 헤치고 오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이 분쟁과 관련하여 감독을 조력한 사실이 있으므로 완전히 무관한 제3자는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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