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추석 밑

초등학교 3학년, 거창에서 더 들어간 시골에서 송아지와 헤어져 부산으로 전학 가던 때. 석탄보다 더 진한 어둠이 몰려오면 내 작은 숨결에도 간당간당거리는 호롱불만 보다가 눈구멍을 쑤실 만큼 들이닥친 네온사인 불빛은 촌놈의 마음을 홀랑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흐르는 형편 따라 짐을 부린 곳은 산복도로에 매달린 달동네였다.

다닥다닥 이웃과 어깨를 맞댄 우리집의 그 코딱지만 한 곁방에 또 세들어 사는 일가족이 있었다. 젊은 부부와 아들 그리고 홀어머니. 밀양이 고향이라고 했다. 부부는 저녁 어스름이면 시내로 리어카를 끌고 나가 카바이드 불빛 아래 멍게, 해삼과 담치를 팔았다. 길거리 포장마차에 딸린 호구지책이라 집안 살림은 전적으로 노인의 몫이었다. 밤에 일하는 부부는 아침부터 곯아떨어졌다. 방을 비워주어야 하는 할머니는 낮에 주로 골목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나보다 서너 살 아래였다. 막 글을 깨치는데 ‘이’라고 써야 할 성(姓)을 ‘10’으로 자꾸 썼다. 아이는 일단 작대기처럼 선을 아래로 그은 뒤 어느 쪽에 동그라미를 놓아야 할지 무척 헷갈려했다. 그 골목에서 얼추 상대가 맞는 나하고 많이 놀았다. 어느 날엔 둘이서 씨름을 하다가 합판 벽에 부딪혔다가 할머니가 막 삶아놓은 보리밥을 왕창 쏟기도 했다. 황망한 표정으로 바닥을 쓸어담는 할머니.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한테 호되게 등짝을 맞던 아픈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골목의 먼지를 몽땅 뒤집어쓴 뒤 맞이한 저녁. 아이와 나는 세수를 했는데 녀석은 퍽 독특한 방식이었다. 할머니가 받아준 세숫대야의 물에 발부터 먼저 씻은 뒤 그 시꺼먼 구정물로 얼굴을 매매 닦았다. 신기한 건 하나 더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녀석은 달력을 보고 그 말갛게 씻은 얼굴에서 입을 벌리며 이렇게 말하는 날도 있었다. 할매, 내 제삿날이 언제야?

그땐 녀석의 성이 아니라 분명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뒹굴고 놀았을 텐데, 저런 일들만 몇 줄 기억에 남고 얼굴도 이름도 깨끗이 잊어버렸다. 최백호의 노래처럼 그이도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지금은 생일밥을 잘 챙겨먹고 있으려나. 잊고 살았는데 최근 녀석의 그 음성이 특히 추석 밑이면 나를 찾아와 이렇게 생생하게 귓전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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