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경제학

이일영 한신대 교수

얼마 전 ‘재야’의 경제학자 정태인 박사(1960~2022)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시중과 언론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에게는 진보 경제학자, 진보 경제정책가, 독립연구자, 경제평론가 등의 칭호가 따랐다. 필자는 그를 ‘재야’의 경제학에 헌신한 이로 부르고 싶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재야’는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한국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재야는 제도권 밖이라는 정치공간,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변혁지향적인 운동, 정치적·경제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도덕성 등을 특징적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재야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정권의 억압으로 제도권 밖으로 밀려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있다. 또한 권력 획득에만 연연하기보다는 국가권력 자체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능동적인 성격도 있다(이기호 교수).

재야는 주로 운동의 정치를 수행했는데, 경제학 분야에서는 재야 운동에 깊숙이 간여한 이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정태인은 박현채(1934~1995)의 제자를 자처하곤 했는데, ‘재야의 경제학’을 말하려면 그 두 사람을 대표적 인물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50~1960년대는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이 전 세계적인 화두였던 시대였다. 19세기 후반 이후 선진국의 산업혁명 사례를 추격하려는 후발·후진국들은 국민경제 형성을 위해 나름의 실험을 전개하였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 안에서 동아시아형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박현채의 재야 활동은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쳐 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50~1960년대에 제기된 자립경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립경제론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나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국민경제 모델에 입각한 산업화 노선을 기본으로 한다. 산업 간 균형이냐 불균형이냐, 수입대체 우선이냐 수출 우선이냐 하는 것은 산업화의 구체적인 전략 문제다. 민족경제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족 분단의 위험,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반동화 등에 대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90년대에 새로운 조건을 맞이했다. 국내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체제가 형성되었고, 세계적으로는 글로벌화와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냉전체제의 이완과 민주화의 진전은 남북관계와 불평등 개선의 징후를 나타냈다. 1980년대 후반 박현채와 적극 교류한 정태인은 민족경제론을 두 가지 방향에서 수정·보완하려 했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진보 이론 내부에 존재하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고전파 경제학 이래 이론의 중심이 되었던 일국적 차원의 생산주의 관점에 전 세계적 차원의 유통주의를 결합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생산양식에 교통양식을 결합하여 사회구성체를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두 번째는 글로벌화 시대를 맞아 민족경제를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결합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적극적인 정책 개입을 통해 현실에 바로 적용하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 적극 참여하면서 ‘동북아’라는 지역주의 비전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노무현 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라는 국정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정태인이 이론의 세계에서 현실정치의 세계로 급속히 돌격해간 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 등의 저술을 접했다. 그가 논의하는 교환양식과 세계공화국 개념을 보면서 정태인의 생각을 떠올렸다. 가라타니 고진은 네 개의 교환양식을 상정했다. 그것은 부족사회의 호혜, 국가사회의 약탈과 재분배, 자본제 사회의 상품교환, 그리고 세계공화국의 고차원적으로 회복된 호혜의 교환양식이다. 정태인은 사회적경제와 협동의 경제학, 동아시아 평화의 경제학을 전개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론적이지만 정태인은 실천적이다.

정태인은 현실 정치권에 적극 개입했지만 결코 제도권 인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진보적 권력을 열망했지만 권력 자체와는 불화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경제학은 변혁을 지향하는 경제학, 도덕성을 추구하는 재야의 경제학이었다. 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나 돌격대를 자임했다. 필자는 그가 정치에 기여하되 정치에 너무 깊이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다. 조금 더 후방에서 숨을 고르고 중도와 공화의 길을 탐색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최전선을 지켰다. 그는 끝까지 기후위기와 동아시아 평화의 경제학을 외쳤다. (그가 그토록 걱정하던 청년들이 또 많이 희생되었다. 함께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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