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씨워진 기사’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자리에 눕는다. 스마트폰을 든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지. 포털 뉴스 창을 연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도 궁금하고, 요즘 논란이라는 채권 관련 소식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엄지로 기사를 스크롤하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문해력이 떨어진 걸까. 그러고보니 요즘 책을 잘 안 읽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출근할 때 책을 한 권 들고 가야지 생각하며 뉴스 창을 닫는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자기 전에 머리를 가볍게 해야 할 것 같다. 유튜브 앱을 연다. 짧은 쇼츠 영상이 눈에 띈다. 아하, 요즘엔 이런 것들이 유행이군. 영상이 쓱쓱 넘어간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젠장,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잘 시간이 부족하다. 아무래도 내일 출근길에 책을 읽기보다는 졸아야겠다, 고 생각한다.

- 요즘 기사가 안 읽힌다. 문해력이 떨어진 걸까.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서 최근 발간된 <스마트 브레비티(Smart Brevity)>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단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 써야 할 것도, 읽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우리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344번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뭔가를 읽을 때 26초를 쓰는데, 문제는 읽을지 말지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0.017초다. 전통적 기사 스타일이 불편해진 게 맞다.

- 전통적 기사 스타일이 뭔데?

‘역피라미드 구조’라고 부른다. 중요한 걸 앞에, 비교적 덜 중요한 걸 뒤에 쓴다. 종이 신문에 넣을 때 기사량을 잘라 맞추는 데 효율적인 방식이다. 뒤부터 잘라내면 되니까. 이를 위해 첫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 ‘리드’가 강조된다.

기사 읽히는 길 스스로 찾는 시대

- 리드가 뭐지?

<스틱>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전쟁을 취재한다고 하자. 통신 사정이 나빠서 딱 한 문장만 보낼 수 있다. 그때 보내는 딱 한 문장”이 바로 리드다. 사건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압축된 한 문장.

- 좋은 것 같은데? 간결하잖아.

뉴스가 다루는 세상이 복잡해졌다. 사회는 양극화 또는 다극화됐고, 모든 사건이 다층적 구조를 가진다.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거의 없다. 자칫 편향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많은 미디어 기업들이 새 기사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 어떻게 바뀌고 있는데?

악시오스는 보고서 같은 개요식 기사를 쓴다. 세마포는 기자의 관점, 반론, 전망을 단락별로 구분해 늘어놓는 ‘세마폼’이라는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드는 ‘렌즈’ 개념을 도입해 다른 시점에서 보는 분석을 싣는다. 카타르 월드컵을 하나의 기사 안에서 노동 렌즈, 인권 렌즈, 건강 렌즈 등으로 관점을 달리해 분석한다. 뉴욕타임스와 가디언도 복잡한 상황을 설명할 때 짧은 문답식 스타일을 자주 쓴다. FTX 파산 사태를 설명하려면 ‘역피라미드’ 구조로는 어렵다. 지금 이 칼럼도 가디언 스타일을 따라 했다.

- 왜 바꾸고 있는 거지?

마르크스식대로라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 뭐라고?

아, 아니. 기술의 변화가 인식 구조를 바꾸기 때문이다. 디바이스와 디스플레이가 작아졌으니까, 우리가 읽는 방식도 바뀌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모바일 환경에서는 짧은 문단이 모여서 다층적 상황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제는 기사가 ‘읽히는’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시대다. 콘텐츠 경쟁자가 얼마나 많은가. 증권사 리포트는 진짜 간결하게 잘 정리돼 있다.

- 그러니까 문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거지?

기사가 읽히도록 노력하는 시기

그래도 복잡한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복잡함을 제대로 설명하는 어려운 글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뉴욕타임스나 가디언이 모든 기사를 실험적 형태로 쓰는 것은 아니다.

- 제목이 쉽게 쓰여진 기사라며.

경향신문 1947년 2월13일자 4면에는 윤동주의 ‘쉽게 씨워진 시’가 실렸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그런데, 왜 칼럼 제목이 11.2㎞야?

물리학에서 이론적인 중력 탈출 속도가 바로 초속 11.2㎞다. 중력처럼 강한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 우주로 날아가려면 이토록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 변화를 위한 발버둥이라는 뜻이다. 요즘 역주행하는 노래 ‘사건의 지평선’과 비슷한 물리학 느낌. 기사가 읽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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