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 파업과 합의의 가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노사는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끼리 합의가 안 돼서 일단 우리에게 중재를 요청했다면, 그때부터는 철저히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파업이나 직장폐쇄는 즉시 멈춰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최대한의 제재를 가합니다.” 몇 년 전 유럽의 사회적 대화 실태를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스웨덴 국립중재위원회에서 들은 말이다. 스톡홀름 감라스탄 남쪽 허름한 건물 안 사무실에서 커트 에릭손 국립중재위 법률부장은 엄청난 얘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냈다. 세계 최고로 노동권이 존중받는 나라에서 노조를 이렇게 엄격하게 대한다니 약간은 의외였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그 대신 우리는 결과로 보답합니다. 노조가 임금 인상을 자제하면 인플레이션을 확실하게 잡아서 설사 명목임금이 깎이더라도 실질임금이 오른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가 보여준 그래프는 1990년 이래 25년간 명목임금은 정체되거나 삭감되는 해가 많았지만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유럽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실제로 스웨덴 국립중재위에 주어진 임무는 세 가지이다. 첫째, 노사갈등의 중재. 둘째, 원활한 임금 결정. 셋째, 임금 관련 통계의 제공. 단순히 중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료에 근거해서 중재의 결과가 노사에 모두 이익이 된다는 점을 꾸준히 입증해 나가는 것이다.

내가 스웨덴 국립중재위를 방문한 이듬해인 2016년, 스웨덴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예테보리에서 항만 파업이 발생했다. 파업의 내용은 이번 한국의 화물연대 파업을 거의 빼닮았다. 스웨덴이나 한국이나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를 가진 나라들이고, 이런 나라에서 물류를 멈추는 것은 국가 경제 전체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다. 파업을 주도한 항만노동자조합은 기존에 운송노동자조합이 전국 단위의 단체협약을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단체협약권을 달라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전국 단위의 경총과 노총이 단체협약을 맺는 스웨덴 모델에서 사실상의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요구로서, 살트셰바덴 협약 이후 70년 이상 산업평화를 유지해온 스웨덴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였다.

일바 요한손 고용부 장관은 예테보리 사태가 산업평화의 모범 사례인 스웨덴 모델을 위협하고 있으며, 노사는 더 이상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면서 파업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스웨덴 정부가 파업권을 제한하겠다는 건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짜 반전은 얼마 후 일어났다. 정부가 미처 개정안을 마련하기도 전에 스웨덴 경총과 대표 노총 세 곳이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파업을 주도한 항만노동자조합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노동자 파업권을 스스로 제한하는 이례적 합의문에 서명했다. 스웨덴 정부는 이 합의문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법 개정 시도를 중단했다. 노총과 경총, 그리고 정부가 모두 동의한 최고의 가치는 오랫동안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스웨덴 모델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 화물연대 파업을 통해 한국은 무엇을 얻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화물연대는 얻은 것 없이 백기투항해야 했고, 정부·여당이 제시했던 안전운임제 3년 연장조차 얻어내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일몰제 폐지와 안전운임제 적용범위 확대를 담은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며 파업에 군불을 땠던 민주당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3년 연장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시효 만료에 따른 안전운임제 완전 폐지를 막아냈다는 명분과 노동계를 같은 편으로 묶어두면서 정부·여당의 협상력을 희석하는 실리를 모두 챙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화물연대가 떠안았다. 정부·여당은 일몰 시한이 다가오도록 별 관심이 없다가 파업이 시작되자 뒤늦게 강경 대응했지만, 장기적인 산업평화에는 오히려 긴장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당장의 행동이 친노동처럼 보이느냐 반노동처럼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합의를 하면 그것이 실제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관리하고 장기적으로 증명해야 할 책임이 정부·여당에 있다. 합의의 가치라는 스웨덴 모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파업권을 제한하는 데 동의한 스웨덴 노총처럼, 모두를 위해 지켜야 할 노동시장에서의 공통의 가치를 도출해야 할 책임이 노사정과 여야 모두에게 있다. 화물연대 파업의 최종 결론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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