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아들이 한 일은

박선화 한신대 교수

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종영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호되는 소재이자 상투성으로 가득 찬 재벌가 이야기지만,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실제 기업 일화들을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엮어내어 흥미를 높였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중심인물인 대기업 창업주 진양철은 타고난 배포와 두뇌, 사람과 세상에 대한 천부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냉철한 카리스마에 빠져들 무렵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대사가 나온다. “머슴을 키워가 등 따숩고 배부르게 만들면 왜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도경영? 내한테는 돈이 정도다.” 서슬 퍼런 그의 곁에 평생을 충견처럼 서 있는 비서실장의 모습이 어스름히 비춰진다. 어떤 인물에게도 개연성을 부여하는 명배우 이성민씨의 매력으로 잠시 잊을 뻔했다. 근현대사의 명과 암. 성공한 자와 그늘에 가려진 자들. 짓밟힌 이들과 밟고 오른 이들을.

자수성가형 진양철보다 답 없는 것은 자손들이다. 스스로 일군 것이라고는 없는 이들이 그저 혈연이라는 이유로 승계를 당연시하고,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존재라 믿는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기업을 키워온 능력 있는 공신들에게도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천한 것들을 이만큼 키워주니 감히 주인한테 대들어?”

“부자 3대”라는 말에는 부자는 망해도 3대는 먹고산다는 뜻도 있지만, 부자 집안이 3대 이상을 가기 힘들다는 뜻도 존재한다. 맨몸으로 시작하여 미래를 바라보며 계속 도전하는 창업주와 달리, 자손들은 드라마 속 순양가처럼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 믿는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경우가 많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을 비롯한 행동경제학자들은 이를 “손실회피 심리”라 칭한다. 아직 못 가진 100만원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이미 가진 100만원을 잃는 두려움이 훨씬 큰 것이 인간 심리라는 것이다. 창업주에서 3세대를 넘으면 기업 존속률이 3~4%대로 낮아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기업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 장수기업엔 오히려 가족기업이 많으며 기업의 평균 수명도 더 높다고 한다. 단 100년 이상을 넘긴, 즉 4~5세대 이상을 넘긴 기업들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첫째는 직원을 가족으로 여기는 경영철학이다. 가족기업이되 가족의 범위를 혈연에 국한하기보다는 기업을 함께 일궈온 모든 직원으로 확대하고 그들의 복지 향상 및 수익금 분배에 진정성을 보이며, 사회환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둘째는 후계자 교육을 장기적으로 준비한다는 점이다. 핏줄이니까 당연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올바른 기업이념을 가진 부모에게서 공동체 오너십을 전수받았기에 가업이 계승되는 것이다.

해마다 노동자 1000여명 가까이 추락, 끼임, 깔림 등으로 사망하는, OECD 평균 사망률 최상위 산재국가를 이끌어가는 한국의 무수한 혈족기업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100년 존속 기업 수” 역시 세계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은 비교불가 수준이다. 일본만 해도 3만개가 넘는다는데 한국은 10개 남짓이다. 늦은 산업화 시기를 고려해도 대단히 부실한 결과다. 결국 혈연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 철학부재의 문제이고, 족벌과 결합해온 퇴행적 정치, 사회 시스템, 내 자식만 잘되면 되는 이기주의가 근본원인이다.

기업수명 자체가 100년 전 90년에서 현재는 15년 수준으로, 미래는 더 줄어든다는 전망이다. 건강한 기업이념과 경영능력 없이는 존속 자체가 2대를 넘기기 힘든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순양가는 막내의 반란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 “등 따숩고 배부른 직원에게 분노하고 돈이 정도”인 기업의 예정된 미래가 다소 앞당겨졌을 뿐이다. 일하다 죽고 다치는 사람이 없는 2023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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