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여자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얼마 전 엄마가 놀러 오셨다. 우리는 TV 속 여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엄마, 엄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엄마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잠시 고민하다 하신 말씀은 “그건 왜 물어?”였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생각도 못해본 여자는 비단 나의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글과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어린 남매를 키우다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니, 시가 어른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식들을 키우시고, 공허해서인지 억울해서인지 날마다 하소연하시는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 며느리, 아내, 엄마의 역할에 얽매여, ‘나’는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집 안에 갇힌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2021)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서 편견 가득한 사회에서 여자가 꿈을 꾼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려면 얼마나 외로운 투쟁을 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자신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딪혀 좌절하는 여성 영화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중년의 영화감독 김지완(이정은)은 세 번째 영화마저 고배를 마신다. ‘꿈꾸는 여자는 남자를 외롭게 한다’며 생활비를 주지 않고 시위하는 남편. ‘애정결핍’을 호소하며 엄마 영화는 재미없다고 응석 부리는 대학생 아들. 두 부자는 지완의 얼굴만 보면 밥 타령을 하며 그녀의 꿈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다 그녀는 한국의 두 번째 여성감독인 홍재원의 영화 <여판사>(1962)의 필름을 복원하는 일을 맡으면서, 당시 보기 드문 선구적인 여성 영화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자신의 삶과 묘하게 겹치는 그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그녀는 영화를 향한 꿈과 열정이 되살아난다.

가슴 먹먹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궁금했다. 왜 지완은 꿈을 꾸면 안 되는 걸까. 왜 그녀는 가사노동을 하는데도 남편과 아들에게 비난을 들어야 할까. 왜 남편은 그녀의 재능과 열정을 아껴주고 응원해 줄 수 없는 걸까. 왜 유독 여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것일까. 그것은 남자는 중심이고 여자는 주변부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의 욕망에 종속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하면, 가족과 사회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남성은 우월하고 여성은 열등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여성이 꿈을 꾼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분명 우리 시대는 <여판사>가 만들어진 때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완의 현실처럼 여성들이 꿈을 꾸고 ‘나’를 찾는 일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희생하는 아내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경력단절로 좌절하는 아내들, 가정과 직장에서 모든 역할을 잘해내기 위해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워킹맘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최대한 결혼을 미루는, 아니 포기하는 여성들.

나 역시 쉽지 않았다. 딸이 유학을 간다 했을 때, 아빠는 아쉬운 듯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네가 아들이면 좋을 텐데….” 이제 나는 안다. 남동생이 유학을 원했다면, 나는 기회가 없었을 것임을. 자격 없는 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다르지 않았을까.

꿈이 허락되지 않는 여자들의 눈물과 한숨. 꿈꾸는 여자들의 처절한 고군분투. 나는 그녀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위로와 존경을, ‘오마주’를 바치고 싶다. 새해엔 부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눈부신 재능을 펼칠 수 있기를, 우리 사회가 그녀들의 꿈과 열정을 응원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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