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전쟁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칼럼] 철학자와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꼭 1년이 되는 시점을 전후로 거의 모든 매체가 이 문제를 연일 크게 다룬다. 지금의 전황과 앞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물론, 이번 전쟁에 직접 관여하는 국가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언론인, 정치인, 군사문제 전문가, 정치학자와 경제학자, 러시아와 동유럽지역 전문가 등 실로 다양한 인물들이 이 문제를 놓고 매일 갑론을박을 벌인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최근 발표된 유럽의 두뇌집단의 하나인 ‘외교에 관한 유럽회의’(ECRR)가 15개국에서 2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흥미있는 결과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설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를 잃더라도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설문 대상 미국인의 21%, 영국인의 22%, 9개국 유럽연합의 30%만 동의했다. 또 ‘전쟁이 장기화하여 많은 인명의 손실이 우려되어도 우크라이나는 그의 영토를 되찾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각각 34%, 44%, 38%나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설문 대상 인도인의 54%, 중국인의 42%, 튀르키예인의 48%가 동의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각각 30%, 23% 그리고 27%만 긍정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방과 그 밖의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정서가 강한 미국과 유럽에서 지금 전쟁을 종식하라는 목소리는 곧장 푸틴을 위한 선전과 선동이거나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평화주의자의 공허한 넋두리로 치부되기가 십상이다.

지난 2월10일, 독일에서 1970년대부터 여성운동에 앞장섰던 알리스 슈바르처와 ‘좌익당’의 원내총무를 지냈던 사라 바겐크네히트는 ‘평화를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독일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계속 지원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고 핵 재앙의 위험을 막기 위한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취지에 이미 65만명이 공감하고 서명했다.

하지만 이는 푸틴에 대한 ‘항복선언’에 지나지 않다는 강한 비판과 비난 여론은 이에 못지않게 거세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공(公共)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철학자 유르겐 하버마스는 지난 2월15일, 독일의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협상을 위한 하나의 변론’이라는 긴 기고문을 발표했다.

하버마스 기고문 싸고 열띤 논쟁

이 글에서 그는 독일을 포함한 서방 측이 우크라이나에 전투무기를 제공하면서도 우크라이나만 협상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일관성이 없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우크라이나는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인 주장과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는 꼭 승리해야 한다’는 자기 이해의 추구 사이에 걸려 있는 애매함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또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쟁 바로 전날인 2022년 2월23일의 상태회복에, 아니면 푸틴 정권의 교체에 있는지, 푸틴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했던 점도 비판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쌍방의 희생이 커지면 커질수록 협상은 더 어렵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핵 참화까지 몰고 오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쌍방의 체면을 동시에 살리는 타협에 독일을 포함한 서방이 나설 것을 그는 촉구하였다.

이 글에 대한 반향은 역시 뜨거웠다. 연일 언론에서 이 글을 두고 찬반의 논평과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종합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하여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뮌헨 안보회의’에서 정치인들의 그 많은 발언보다 훨씬 유익하다고 평했다.

다른 편에서는 이와 반대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물론, 냉엄한 현실정치를 모르는 철학자의 순진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위에 언급된 안보회의를 작년까지 주관했던 독일의 전 주미대사 볼프강 이싱거는 하버마스를 존경하지만 그에게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감정이입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주독 대사였다가 현재 우크라이나의 외무차관인 안드리 멜리니크는 하버마스를 푸틴을 옹호하는 ‘도덕적 파산자’라고까지 공격했다.

흡사 ‘낭떠러지 앞을 거니는 몽유병자’처럼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처하는 독일을 포함한 서방세계에 대해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의 해결책을 모색한 이 글은 곧 활용될 수 있는 가전제품의 ‘사용설명서’와 같은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면 하버마스는 누구인가. 단행본만 해도 60권이 넘는, 그의 방대한 저서는 5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국내에서도 그의 중요한 저서 10여권이 이미 번역 소개되었다. 1996년 4월에는 2주 동안 한국을 방문, 학자들과의 토론과 대중강연도 가졌다. 나는 20대 때 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 2003년 가을에 37년 만에 귀국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곤욕도 치렀다. 그때 그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엄청난 지적 관심을 지닌, 자유스러운 사상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사려 깊은 세계 안에만 안주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글의 힘을 빌려 이성적인 공론의 세계를 꾸준히 확장시켰다.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큰 사건들을 극도로 정제되고 균형 잡힌 그의 글이 다루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50년대 동서냉전으로 굳어진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 전 세계를 흔들었던 1968년의 저항운동, 독일 통일, 유럽통합, 발칸분쟁, 정보사회, 코로나19 팬데믹과 기본권 등에 관한 그의 견해는 시의적절하게 논쟁의 화두를 제공했으며 보통 놓치기 쉬운 많은 문제를 항상 생각하게 하였다.

한반도 평화 되씹게 하는 메시지

그는 철학,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법학, 종교, 과학과 기술, 정보사회 등 학문세계가 다루는 거의 모든 영역을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이의 결과는 공론장에서 항상 활발한 논의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오늘날의 학문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그의 거대한 사상체계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보통명사 철학자가 아니라, 고유명사 ‘철학자’로 불린다.

우크라이나 전쟁문제와 관련된 그의 글에 많은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심지어는 저열한 인신공격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하버마스의 철학적 기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물론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그의 글에서 이를 쉽게 알아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가 수십년 동안이나 천착해온 철학적 관심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의 중요한 출발점과 만나게 된다. 바로 그의 ‘담론(談論)윤리’다. ‘네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칸트의 절대적 도덕 명제는 개인에 기반을 둔 윤리다. 이와 달리 그의 담론윤리는 사회성원 간의 의견 차이와 이에 따른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일정한 논증의 규율을 좇아서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합의에 도달하는 소통과정을 강조한다. 대체로 개인의 자율성이나 정의와 같은 규범을 윤리의 기초라고 보는 철학자들은 사회성원 간의 열린 합의 과정을 강조하는 담론윤리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에 걸쳐 베를린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전쟁승리를 위해 더 많은 무기지원을 요구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이 각각 주최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푸틴과의 협상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그래도 협상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정치의 현장이었다.

이 전쟁이 장기화하는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출구전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중국이 중재에 나섰지만, 이 전망도 현재로서는 밝지 않다. 이러한 현실 앞에 하버마스도 푸틴과의 협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 6월이면 만 94세를 맞는 노철학자의 절제된 글은 여전히 이성에 기초한 소통의 힘을 믿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날이 갈수록 전쟁의 위험한 파도가 몰려드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체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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