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논어와 노인

음력과 양력이 겹치는 달력에서 이제야 온전히 계묘년이 되었다. 기억이 더 달아나기 전에 작년 신문에서 배운 논어를 복기해 본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의 각주인 것처럼 동양의 웬만한 글은 논어의 풀이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현실을 조금은 괴이쩍게 반영하기도 하는 신문에도 논어의 그림자는 자주 얼비친다.

임인년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 비행기에 한 언론사가 배제되었다. 이러다가 부당함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음을 기본으로 삼는 모든 출입기자들이 연대하여 탑승을 거부하겠다면 어쩌려고? 하지만 그건 나의 괴이쩍은 추측에 불과했고 뜨거운 뉴스의 현장을 배제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다른 두 언론사가 그 비행기를 타지 않고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자발적인 배제에 동참했을 뿐이었다. 논어에 ‘덕불고 필유린’이란 공자의 말씀이 있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해도 ‘삼인행’이란 말도 있다.

논어의 ‘삼인행 필유아사’는 거개가 이렇게 해석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다는 것. ‘삼인’이 굳이 세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 것도 알긴 알겠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세 사람과 만나더라도 휙 지나가는 그들한테 무엇을 배우기란 실은 쉽지가 않다. 조금 미간을 좁히며 이런 건 어떨까. ‘행’은 간다와 행한다는 뜻이 어금버금하다. 그러니 세 사람과 어떤 일을 함께 행할 때, 이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것. 앞에서 배제당한 쪽, 배제한 쪽, 이 사태를 지켜본 이들은 저 ‘삼인행’에서 배운 바가 없지는 못할 것이다.

작년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논어의 과이불개(過而不改)였다. 몇 해 전에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문장에는 꼬리가 더 있다. “죽은 후에나 그칠 수 있으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세밑 경향신문에서 읽은 서정홍 선생의 칼럼 ‘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의 한 구절은 나른한 일상에 매몰된 내 눈구멍을 세게 때렸다. 논어도 힘이 세지만 농부 시인이 전하는, 마을 어르신들께서 평생 체득한 심중도 이에 못지않았던 것. 섭섭한 듯, 개운한 듯, 논어에 직방으로 연결되는 말씀이었다. “아이고, 농사일이 오데 끝이 있는가. 고마 죽어삐야 끝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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