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된 건물의 창문 앞에서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내게는 이제 하나의 믿음이 생겨
읽기는 노래만큼 춤일 수 있고
노래와 춤이 있는 한,
우리 언어와 공부, 그리고 투쟁은
어떻게든 봉쇄를 뚫을 것이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1977년 미국의 장애인들이 정부를 향해 재활법 504조에 서명할 것을 촉구하며 보건교육복지부를 점거한 적이 있다. 재활법 504조는 연방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에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예산지원을 받는 대학 등 수많은 기관과 프로그램들이 적용대상이었다. 의회에서 재활법이 통과될 때만 해도 이 조항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저 공적인 영역에서 누구도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아름답지만 식상한 문구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 문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정부가 발을 빼기 시작했다. 지금 이 나라의 정부처럼 당시 미국 정부도 장애인들에게는 문구만 주고 예산은 다른 데 쓰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의 책 <나는, 휴먼>에서 이때의 일을 읽다가 뭉클한 대목을 만났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장애인들의 점거 행동에 인내하면서 합리적 제안을 내놓은 듯 언론 플레이를 했지만, 실제로는 건물을 폐쇄하고 점거자들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온수 공급을 끊었고 음식과 약품의 반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화를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점거자들의 입장과 처지를 바깥에 알릴 방법을 없애버렸다. 적어도 정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목소리를 차단함으로써 말을 봉쇄했다고.

그러나 음성을 차단한 방벽을 몸짓이 뚫었다. 점거자들 중에는 청각장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섰다. 그러고는 수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결연한 투쟁 성명과 간절한 연대의 호소가 소리 없이 또박또박 전달되었다. 건물 바깥에 있던 청각장애인과 수어 통역사들이 그것을 전달했다. 블랙팬서 등 여러 단체에서 음식과 의약품을 들고 찾아왔고 언론도 메시지를 받아 보도했다. 결국 정부는 건물 봉쇄에 실패했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재활법 504조의 실행 규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휴먼은 수어를 자신들의 비밀병기 중 하나였다고 했지만 정작 그것을 비밀병기로 만들어준 것은 비장애인들의 편견이었다. 음성언어만이 언어이고 수어란 기껏해야 유사언어에 불과하다는 편견이 창문이 돼 외부와의 통신선을 구축해준 셈이다. 나 역시 해방의 언어를 함성으로만 생각했지 몸짓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머리로는 수어를 다른 언어와 동등한 언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든 수어는 ‘그들’의 언어였다. 잘하는 언어가 아님에도 대학에서 영어로 이루어진 강연을 들은 적이 있고 영어로 강연을 한 적도 있지만, 수어로 이루어진 학술 강연에 참여하거나 강연을 한 적은 없다. 청각장애인 선생님의 강연을 들어본 적도 없고, 청각장애인 학생의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런 걸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엊그제 철학 강의를 하면서 내가 그동안 봉쇄된 건물 안에서 공부해왔음을 깨달았다. 강의 내용은 한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에서 지적 장애가 배제되거나 방치된 이유를 살펴보며 거기 깃든 인간 개념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강의실에는 수어 통역사가 있었다. 그는 철학 개념이 난무하는 내 말들을 손짓과 표정으로 번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강의에서 다룬 철학자는 청각장애에 대해 꽤나 고약한 언급을 했다. 그는 음성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청각장애인은 “기껏해야 이성의 유사물에 이를 뿐”이고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검토할 수 있는 사교나 공론의 장에 참여할 수 없어 “고독의 저주에 떨어진다”고도 했다. 지성과 사교성을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그에게는 청각장애인이 인간다움에 큰 결함이 생긴 인간으로 비쳤을 것이다. 수어 통역사는 이 모든 이야기를 통역했다. 수어로는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을 통역했고, 청각장애인은 고독의 저주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사람들, 특히 강의실 어딘가에 있을 청각장애인들과 나누었다.

이날 나는 봉쇄된 철학 건물의 창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목소리의 세계 안에서만 공부를 해왔다. 사실은 봉쇄된 세계에 갇혀 있는 줄도 몰랐다. 창문 앞에 서서 건물의 봉쇄를 뚫고 메시지를 전하는 이 날의 위대한 몸짓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서구의 독서 경험에서 일어난 큰 변화를 언급하면서 12세기경 페이지들이 ‘악보’에서 ‘텍스트’로 바뀌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읽는다는 것은 애초에 노래였는데 눈으로 읽는 텍스트가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읽는다는 것은 애초에 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어느 것이 먼저든 상관없다. 내게는 이제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우리의 읽기는 노래만큼이나 춤일 수 있으며, 노래와 춤이 있는 한, 우리의 언어, 우리의 공부, 우리의 투쟁은 어떻게든 봉쇄를 뚫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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