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경제이념

이일영 한신대 교수

다시 4월19일이다. 그러나 먼지 때문인지, 우울 때문인지, 그날 감격의 분위기가 아련하다. “새로운 신화 같은, 젊은 다비데군(群)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앞이 잘 안 보이는 지금, 질문을 던져보자. 4·19는 혁명인가? 4·19는 5·16 군사정변에 의해 쓰러졌는가? 혁명은 자멸한 것인가?

이일영 한신대 교수

이일영 한신대 교수

필자의 관점에 의하면, 4·19는 ‘체제’적 혁명이다. 4·19를 계기로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자유주의, 국민주의(민족주의), 발전주의라는 경제이념이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다. 4·19를 계기로 국민경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국내적 정치·경제 체제가 세계체제-분단체제에 연결되어 작동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는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에 의존하는 시대였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에 의존하는 안보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정치·경제 부문에서 안정적인 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치적 권위주의 아래에서 정부는 재정의 절반 정도를 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1950년대에 이미 국내체제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이승만 정권(레짐)은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조직했고, 1960년 4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경제이념상으로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이 강하다. 1950년대는 기본적으로 원조에 의해 지탱되는 체제였다. 이승만 정권이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추진한 것도, 미국이 원조 감축과 ‘자립’ 요구로 정책을 변경한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장면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모두 경제적 ‘자립’을 강하게 의식했다.

4·19 혁명은 국민적 차원의 정치·경제 체제를 형성하는 국가 의지의 기반이 되었다. 4·19 이후 성립한 장면 정권은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때 경제개발계획의 핵심 내용은, 관치경제를 청산하고 자유경제 질서를 확립해간다는 것, 안정 농가와 중소기업을 적극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4·19의 국민적 저항이 일어난 데에는 이승만 정부의 신익희·조병옥 등의 자유주의, 조봉암 등의 진보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도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성립한 장면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분열적이었으나, 경제정책 구상은 자유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정책연합의 성격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장면 정권의 붕괴는 내부 분열과 외부의 반란이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시 민주당은 이재학 등 자유당 온건파와 연합하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는 신파·구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신파의 장면 총리 세력이 내각 인사를 독점했고, 민주당 구파는 신민당으로 분열해 나갔다. 또한 장면 정권과 학생·혁신계 세력은 통일운동과 반공법·데모규제법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적대했다.

장면 정권의 정치적 분열과 협소한 권력 기반은 중도적·공화적 경제정책을 추진할 능력을 소진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김종필 등 군부 소외 세력이 결집하여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장면 정권은 지지력을 잃고 힘없이 무너졌다.

4·19 혁명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발전주의 경제이념은, 5·16 군사정변, 박정희 정권 수립, 한일협정 체결을 거치면서 성장주의 우위의 체제로 귀결되었다. 4·19 혁명이 혁명 체제를 그 자체로 공고화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5·16 이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은 분열했고, 혁신계 진보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은 “박정희의 민족주의를 의심한다”면서 반공적 자유주의 공세를 펼쳤다. 1964년 6·3 항쟁에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며 야권과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했지만, 정권 붕괴의 위기는 계엄령 선포와 미국·일본의 지지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이후 자신의 흔적을 체제 안에 남겼다. 한국은 한일협정을 계기로 세계체제의 자본주의 진영과 연결되는 성장주의 산업화 체제로 나아갔다. 이 성장주의 체제 안에는 국민국가의 국내체제를 구성하는 자유주의·국민주의(민족주의)의 경제이념이 내장되었다. 4·19의 동력이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은 박정희 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일부를 성장주의의 요소로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성장주의 체제는 성장의 한계가 체제 위기를 가져온다. 지금은 세계체제의 분리가 시도되면서 한국의 성장주의가 벽에 부딪힌 상황이다. 위기 속에서, 전환의 기회와 4·19의 부활, 자유주의·민족주의·세계주의의 공화적 균형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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