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과 기능 분화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지난달 27일 간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0년대 들어 여러 차례 간호법 제정이 추진되기는 했지만, 정치권의 합의 불발과 의료 관련 단체의 대립으로 폐기되기 일쑤였다. 이번에는 다를까 싶었는데, 또다시 같은 행로를 밟을 기미가 보인다. 민주당은 단독으로 처리했고, 국민의 힘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 요청을 검토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국을 살피며 결정을 고민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해 간호법 제정에 반대하는 의료 관련 단체가 나서 간호법 재논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총파업을 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직접 당사자 격인 대한간호사협회는 간호법 통과를 환영했다. 대한한의사협회도 간호법을 공식 지지하고, 만약 의료계가 총파업에 돌입하면 발생할 의료 공백은 한의사들이 메우겠다고 선언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이렇듯 갈등이 다시 폭발하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우선 직역 간의 갈등으로 보도한다. 의사단체는 간호사가 의사 없이 지역에서 단독으로 의료행위를 하고 심지어 개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며 간호법을 반대한다. 간호사 단체는 업무에 대한 범위가 정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간호사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며 현실을 반영하는 법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간호조무사 단체는 충분한 의료 지식과 훈련을 갖추려면 간호조무사 양성을 위한 2년제 대학 학과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언론은 야당과 여당의 정치 공방으로 본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간호법 제정을 공약했다며 약속을 지키라고 몰아붙인다. 국민의 힘은 가짜뉴스라며, 윤 대통령은 단지 간호사 처우개선에 대한 원칙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맞받아친다. 더 나아가 보수와 진보의 진영 대립으로 보도하기도 한다. 당정은 노골적으로 사회적 강자인 의사협회의 손을 들어주는 편파적인 중재안을 내 갈등을 키운다.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빼앗긴 정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간호법을 볼모로 삼아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목적으로 선동을 일삼는다.

간호법을 직역 간의 밥그릇 싸움, 정치권의 전략적 표 계산, 보수와 진보의 이념 투쟁으로만 보아야 할까? 체계 이론가로 이름 높은 사회학자 루만은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루만이 볼 때 ‘환경’은 항상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체계’에 부과한다. 체계는 이러한 복잡성을 줄이기 위한 선택 절차를 개발한다. 현대 사회는 이 점에서 매우 뛰어난 체계다. ‘계층적 분화 형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이전 사회와 달리 ‘기능적 분화 형식’이 지배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카스트처럼 굳게 닫힌 계층적 체계와 달리, 기능적 체계는 닫히자마자 다시 열린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수정할 수 있는 자유가 증가한다.

루만의 시각에 따르면 간호법 제정을 둘러싸고 치열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의료 환경이 복잡해지고 우발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만성질환 노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질병 치료 못지않게 예방과 관리가 중요해지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은 의료 현실과 미래의 차이를 더욱 키웠다. 이러한 복잡한 환경이 제기하는 우발성을 도식화하려면 법체계 역시 기능적으로 분화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법은 불변의 최상위의 초법적 규범에서 타당성을 끌어오지 않는다. 입법과 사법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실정법이기 때문이다. 법의 재검토 가능성을 높여 급변하는 사회에 법체계가 더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돕는다. 현행 간호법의 근간이 되는 의료법을 제정한 지 70년이 넘었다. 헌법마저도 계속 개정되는데, 의료법이 변화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돌봄 수요가 폭증하는 환경에서 돌봄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자비’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 적대감을 가라앉히고, 기능분화의 관점에서 간호법 개정에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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