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건설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황규관 시인

노동절인 지난 5월1일에 분신을 한 건설노동자 양회동씨가 끝내 숨졌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동자들을 범죄자로 몬 것이 그 핵심 이유였다. 양회동씨는 자신에게 적용된 ‘공갈’이라는 혐의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는데, 당연히 그는 공갈범이 아니라 건강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였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사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자 혐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요구와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단체행동을 무조건 불법으로 규정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추락한 국민적 지지도를 만회하기 위한 정치 술수인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이 쓴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었는가>에는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 고문을 가할 때, 자신들의 도덕적 하자를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도 회칠하려는 심리적 술책을 사용했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술책은 우리도 꽤 오래 겪은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동자들을 향해 ‘건폭’이니 ‘공갈’이니 ‘협박’이니 하는 혐오 언어를 쏟아붓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삶 자체가 온통 폭력과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건설노동을 하면서 살려는 생각을 제법 진지하게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주말이면 가끔 아르바이트 삼아 일용직 노동, 시쳇말로 ‘잡부’ 일을 하고는 했다. 일당은 5만원이었는데 수수료를 떼면 4만5000원이 내 손에 쥐였다. 그런 비정기적인 육체노동은 역설적으로 신체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했고, 성격이 수더분하지 못해서 갈 때마다 낯선 현장에서 받는 심리적 스트레스도 제법이었다. 내가 건설노동을 한때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은, 물론 육체노동이 ‘진짜’ 노동이라는 편협한 사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육체노동이 도리어 정신을 맑게 하고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나름의 경험이 있어서였다. 사실 육체노동만이 ‘진짜’ 노동이든 아니든 우리는 일정하게 몸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맞다. 건설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고단함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하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4차산업혁명이니 지식노동이니 하는 말들이 육체노동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이윤의 원천은 무엇인가?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이 대단한 혁신인 것처럼 떠드는 것에 솔직히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은, 결국 온라인 플랫폼 기업의 이윤도 배달노동자들의 육체노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혹은 기존의 중소 상공인들을 몰락시켜야만 그들의 ‘혁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제와 산업의 형태가 바뀌어도 육체노동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한갓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육체노동을 혐오하는 뿌리 깊은 문화 유전자가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육체노동자를, 과장해서 말하면 불가촉천민 취급을 한다. 공부를 못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장래 모습으로 꼭 육체노동을 지목하는 경멸스러운 사고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농사를 짓던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이 자식만은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기를 바란 것도 단지 농사가 힘들고 돈이 되지 않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농부에 대한 사회적 무시와 생존을 위협하는 ‘근대적 빈곤’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부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생존이 보장되는 경제 구조였어도 자식들을 그렇게 기를 쓰고 대학으로, 도시로, 지식노동으로 내몰았을까. 이것은 가정법을 염두에 둔 질문이 아니다. 이른바 인간 대접은 바로 사회적 존중인 것이며 이 사회적 존중의 기본 중의 기본은 빈곤 상태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꾸려지지 않았고, 도리어 육체노동을 끝없이 혐오하고 배제하는 문화를 강화해 왔다. 이는 사회 엘리트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보이는 병리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한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화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뻔한 노릇이다.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 독재로 고착되자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제국주의였다. 즉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계급 중 시민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배반하면서 그나마 알량한 서구의 민주주의는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로 변질된 것이다.

건설노동자 양회동씨의 분신자살에는, 어쩌면 이렇게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정신적 염오(染汚)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우리의 시민 정신을 좀먹는 장본인들은, 탐욕스러운 자본과 가짜 민주주의에 기생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혐오 장사에 몰두하는 언론이 형성한 카르텔 구조다. 윤석열 정부는 그것의 화룡점정인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이 카르텔 구조를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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