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부, 이러다 우리 다 죽어!

우석훈 경제학자

윤석열 정부가 못하는 게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못하는 게 예산 관리 아닐까 한다. 제대로 쓰는 돈도 없는데, 세수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저기 칼질하느라고 난리도 아니다. 칼자루를 쥔 기획재정부의 칼질이 전례 없이 투박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국가 설계 및 운영 전반에 경제만 아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완장질을 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검사 시절 별명이 칼잡이였다더니, 요즘 경제 당국이 칼잡이처럼 예산을 난도질하고 있다. 이번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크게 떼돈 버는 일도 아닌 연구·개발(R&D)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들은 단지 정부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카르텔’이 되었다. 앞에서는 예산 당국이 칼질을 하고, 뒤에서는 감사 당국이 몇년 치 영수증을 탈탈 털며 실정법을 들이대고 있다. 만약 어느 엔지니어가 백지에 가까운 영수증을 제출하면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잉크가 휘발돼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수년째 진행되던 연구 과제들이 결실을 못 보고 칼질 앞에 휴지 조각이 되고, 새로운 과제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야 하는 형국이다.

우석훈 경제학자

우석훈 경제학자

올해 3월 정부는 제1차 국가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을 수립하면서 “5년간 170조원의 R&D 예산을 투자하여 정부 총지출 대비 5%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아직 반년도 안 지났는데 신규 연구는 물론 진행 중인 연구사업 예산도 일괄 삭제하려고 한다. 하던 과제는 줄이고 새로운 과제는 못하게 하는 것도 큰일인데, 국책 연구소 예산도 대폭 줄이는 기관 예산 삭감 계획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R&D 예산을 곶감 빼 먹듯이

한국 정부의 R&D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늘었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에도 민간 R&D 투자는 줄었지만 정부 투자는 증가했다. 1997년 3조3000억원, 1998년 3조5000억원을 투입했다. 군사정권이라고 욕은 하지만, 박정희 시절에는 개도국으로서는 전례 없이 공격적으로 과학기술에 투자했다. 그동안 정권교체가 여러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턱대고 R&D 예산을 삭감하는 정권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일찍이 없었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는 지금이 지난 세기 IMF 경제위기 때보다 더 가혹한 보릿고개가 되었다.

정부의 R&D가 이렇게 중요해진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기존 각종 수출 보조금 등 수출 관련 지원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등 많은 나라는 수출 예산을 R&D로 돌렸고, 그 결과물을 공공 기술이전 등으로 민간에 지원하는 것을 산업 정책 중심축으로 삼았다. 우리도 그렇게 했다. 연구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처럼 아예 예산 자체를 일괄 삭감하는 것은 ‘예산 갑질’일 뿐이다. 일부 부정한 연구팀에 벌을 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연구비와 기관운영비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산업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갉아먹는 일이다.

R&D 예산에서 공공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0년 16%에 불과했다. IMF 경제위기 한가운데인 1998년에 처음으로 30%를 넘어섰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도 29%로 많이 늘었다. 요즘은 23~24% 수준이다. 역대 정권은 경제위기 때면 위축된 민간 R&D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우리가 그렇게 기술선도국이 된 거지, 정부가 뒷짐 지고 빨간펜 노릇이나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다른 것을 줄이고 R&D에 더 돈을 들여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도 넘어온 건데, 윤석열 정부는 경제가 어렵다고 R&D 예산부터 곶감 빼 먹듯이 빼 먹을 생각이다.

삼성, LG 등 한국 대기업들이 요즘 이래저래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R&D 예산을 윤 정부처럼 줄이려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늘리거나 그게 정 어려우면 현재 수준을 유지라도 하겠다는 게 주요 기업들 입장이다. 정권이야 망하면 그만이지만 기업은 그럴 수가 없다. 민간에서는 R&D에 공격적으로 투자해서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려고 하는 게 기본 전략인데, 정권은 예산·감사 당국을 동원해 R&D 예산을 빼서 세수 부족을 막으려고 한다. 과학자들 눈으로 보면 IMF 경제위기보다 더 큰 예산위기가 온 셈이다.

‘공업입국’의 기반 무너뜨려

이렇게 1~2년만 더 하면 한국 경제는 진짜 망한다. 안 그래도 척박한 연구 생태계가 산불 난 것처럼 대규모로 초토화되는 중이다. 윤 정부가 지금 펼치는 과학기술 정책에는 <오징어 게임>의 저 유명한 대사가 딱 들어맞는다. “이러다 우리 다 죽어!”

R&D 투자는 금액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고 질적인 측면도 중요한 건 맞다. 그렇지만 기술 로드맵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연구 예산 일괄 삭감이라는 칼을 휘두르는 것은 ‘공업 입국’을 목표로 여기까지 온 이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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