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자의 말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 “출입국 외국인 정책은 인류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익,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숙련 기능인력 장기 취업비자 제도 제정이 필요하다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한 말. “대한민국 국민 5000만이 모두 주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면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 헌법 정신의 뜻을 묻자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한 말. “육사는 1945년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해서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서 1948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했다.” 육사의 정신적 뿌리를 묻자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 한 말. “우리는 매국노의 상징으로 이완용을 비난하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했다 하더라도 일본과 국력 차이가 너무 현저해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보수집회에서 한 말.

국가주의자의 말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주의자는 국가를 ‘절대주권’의 주체로 본다. 명확하게 구획된 특정 영토에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합법적 폭력을 독점해야 한다는 생각은 17세기 유럽에서 나왔다. 이전에는 특정 영토 안에 황제, 왕, 왕족, 귀족 등 세속 권력은 물론 교황, 주교, 수도원장 등 종교 권력, 길드와 도시, 토지 소유자와 상인 같은 제도화된 세력이 정치적 권위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참혹한 30년 전쟁을 끝낸 유럽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유럽 각국은 상대방 국가를 그 영토 안에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절대주권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국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절대주권 개념이 유럽을 벗어나자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돌변했다. 중앙집권화된 근대 관료조직이 없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는 무주지로 전락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주지를 선점하려 무한경쟁을 벌였다. 선점만 한다고 해서 국제법상 자기 땅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다. 절대주권을 휘둘러 실효적 지배를 해야 했다.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관료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기존 세력을 불법적 폭력집단으로 몰아 말살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절대주권을 만들지 못한 조선도 무주지로 전락했다. 무주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일본제국주의가 무주지를 선점했다. 실효적 지배를 하기 위해 일제가 합법적 폭력을 독점해서 기존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제거하고 절대주권을 수립했다. 조선인은 모두 일본제국주의 국가의 신민이 되었다. 거부하면 무국적자로 추락했다. 일본제국주의 국가의 합법적 폭력에 대항해서 독립운동하는 홍범도·안중근·김구·윤봉길·이봉창은 모두 불법적 폭력을 저지르는 무국적 테러리스트다.

국가주의자는 항상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당대 국가’를 맹종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미 군정기에는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에,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한다. 언젠가부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자율적 시민이 만든 보편적 연대’라는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수천년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인류가 함께 가꿔온 역사적 성취라는 점은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를 1948년 수립된 신생 국가와 일체화해서 대한민국의 가치를 반공으로 쪼그라트린다. 어떤 시대든 국가주의자는 자신이 독점한 합법적 폭력을 써서 적을 토벌할 궁리만 한다.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한 국가주의자의 말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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