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리망의, 견리사의

연말이면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한 고향집에 내려와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나의 매해 일과이다. 지금이야 기차를 타고 올 수 있지만 고속철도가 놓이기 전인 2017년 12월 전까지만 해도 집에 가는 방법은 고속버스뿐이었다. 그러던 중 2017년 한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동서울터미널에서 장애인의 시외이동권 보장과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 후 버스 탑승을 시도한 것에 대해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을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편을 찾아보았다. 결과는 예상을 넘었다. 고속버스로는 2시간3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강릉을 서울에서 기차로 가는 데는 약 5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차편도 하루에 서너 대밖에 없어 실질적으로 이용하기는 어려웠다. 10년이 넘게 오갔던 고향은 내가 휠체어를 이용해야 했다면 쉽게 갈 수 없는 머나먼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9년 10월28일 휠체어 탑승설비를 갖춘 고속버스가 시범운행을 시작했다. 이후 총 4개 노선에서 10대 버스가 시범운행을 했지만 그마저 2023년 모두 중단되었다. 버스회사들은 잦은 휠체어리프트 고장과 더불어 이용률이 저조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저조한 이용률은 단지 수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장애인이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집에서 터미널까지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속버스 시범운행 중단은 오히려 이동권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교통수단, 시설의 개선 여부가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2021년 12월3일 세계 장애인의날을 맞아 전장연은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시작했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는 외침이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경찰은 강경대응을 지속해왔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11월 지하철 역사 진입 자체를 막겠다며 3단계 강경대응을 발표했고, 승강장, 대합실에서의 기자회견마저 철도 이용의 안전과 질서를 해친다며 활동가들을 역사 밖으로 내몰았다. 침묵하며 손팻말을 드는 것마저 권유행위로 퇴거를 요구하고 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체포도 이어졌다.

시민들의 피해와 불편을 막아야 한다. 서울교통공사 등이 계속해서 든 이유는 이것이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이 말 앞에서 20년째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함께 교육받고 노동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시민들의 피해와 불편은 삭제되었다. 누군가의 불편은 사회가 감수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누군가의 불편은 공권력을 동원해 지하철 역사에서 사람들을 내몰아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모두가 불편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받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그렇게 멈췄다.

지난 11월21일, 전장연이 그간 요구해온 특별교통수단 예산 증액분 271억원이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된 것은 그렇게 멈춰버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에 1월2일 전장연은 “시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를 이야기하며 총선에서 장애인 시민권 보장 의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예고했다.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시민들이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사회는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2023년 대학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더라도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2024년은 나의 이로움이 누군가의 불이익 위에 성립되어 있지 않은지, 모두의 권리와 의로움을 위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그 시작을 열 전장연의 외침을 지지한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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