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중증장애인이 뭔 노동’ 생각했나
그들의 파업에 언론들도 시큰둥

서울시 국어사전엔 아마도
‘동행’ 뜻이 ‘함께 간다’가 아니라
‘데리고 다닌다’로 적혀 있는 듯

지난 연말 서울시가 재정을 투입해 만든 일자리에 종사하던 수백 명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시가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업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정리해고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리해고, 파업, 복직 투쟁.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흔히 들을 수 있는 뉴스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는 이 흔한 뉴스를 그대로 전하는 언론이 거의 없다. 기사에는 정리해고도, 파업도, 복직 투쟁도 없다. 간혹 이 말들을 쓰는 경우에도 당사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식이다. 이들이 엄연한 임금노동자이고, 정리해고가 된 것, 파업에 돌입한 것, 복직 투쟁에 나선 것이 모두 사실임에도 그렇다. 이는 이들이 중증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중증장애인이 무슨 노동을 하느냐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에 해고가 해고로 보이지 않고 파업이 파업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실 서울시가 이번에 폐지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은 발상부터 획기적인 것이었다. 사업명이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 ‘권리중심’이라는 말은 이 사업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시책이 아니라 장애인이 ‘주체’로서 행사하는 ‘권리’임을 밝힌 것이다. ‘중증장애인 맞춤형’이라는 말은 이것이 중증장애인이 잘할 수 있고 중증장애인만이 잘할 수 있는 일임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맞춰진 우리 노동 개념 자체를 깨뜨리자는 뜻도 담겨 있다. 또 ‘공공일자리’라는 말엔 공공기관이 창출한 일자리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 노동의 공적 성격을 인정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 노동이 사적 이윤을 발생시키지는 않지만 공공의 가치, 이를테면 우리 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참여적이며 인권친화적인 사회로 만든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업에서 중증장애인들은 인권차별을 증언하는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 장애인을 차별하는 각종 장벽들에 대해 시정을 촉구하는 ‘권익옹호 활동가’, 자신들만의 노래와 몸짓을 표현하는 ‘문화예술가’ 등으로 활약해왔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조상지씨는 국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일을 하면서 나도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날 못다 한 증언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장애인 자식을 낳았다며 가슴앓이를 하던 엄마가 이제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다닌다고 썼다. 첫 월급을 드리던 날, “너 죽은 후에 내가 죽어야 하는데”를 되뇌던 엄마는 “너는 오래오래 재밌게 살다가 오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기쁜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된다. 어쩌면 더 이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권 강의를 하면서 자신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고, 그런 자기 존재의 소중함도 느꼈을 것이다. 가치를 생산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가치 있는 자로 생산한다. 그런 존재는 타인 앞에서 빛난다.

그런데 서울시는 이 사업을 폐지하고 ‘장애유형 맞춤형 특화일자리’ 사업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말은 첨단이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예민한 감각을 활용하는 ‘인공지능데이터 라벨러’, 근육장애인에게는 ‘불법 저작권 침해 콘텐츠 모니터링’ 직무를 맡긴다고 한다. 지체장애인은 스포츠센터 같은 곳에서 라커 키 나눠주기와 수건 정리 등 보조업무를, 발달장애인은 택배 물품 상하차 보조업무를 한다. 장애인 인권을 개선하라며 손팻말 들고 시끄럽게 굴거나, 불협화음에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질러대는 공연보다는 이런 것들이 일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스포츠센터’ 같은 폼 나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핵심은 거기 붙어 있는 ‘보조’라는 말에 있다. ‘스포츠센터’에서 일하는 건 맞지만, 거기서 하는 일은 ‘라커 키 나눠주기’인 것이다. 말하자면 비장애인들이 하는 일 중 중요하지 않은 몇 가지 일을 떼어주는 식이다. 장애인이니까 하는 심정으로 눈감아주고, 그 정도면 잘한 거라고 박수 쳐주는 일들, 중증장애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이 못난 존재임을 확인케 하는 일들 말이다. 이마저도 내가 아는 중증장애인들 대부분은 잘 해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보도자료까지 뿌리며 이것이 시정 목표인 ‘약자와의 동행’을 실현한 거라고 자랑한다.

과연 중증장애인들과 동료로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들을 우리 곁의 소중한 존재로 느끼는 것은 언제일까. 스포츠센터 입구에서 라커 키를 나눠줄 때일까, 상지씨처럼 “욕실로 기어가 바닥에 있는 물을 핥아 먹었던” 시설 경험을 들려주며 우리 사회의 인권 상황에 대해 말할 때일까. 아마도 서울시의 국어사전에는 ‘동행’의 뜻이 ‘함께 간다’가 아니라 ‘데리고 다닌다’로 적혀 있는 것 같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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