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상운행

열차 운행 방해가 장애인이 아닌
서울교통공사의 무기가 되었다
게다가 무정차 책임까지 뒤집어써

장애인 내쫓고 정상 운행된 열차
그 정상을 되찾은 나날이, 난 무섭다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시작된 지 만 2년 되었다. 아직도 지하철에서 그러고 있나 놀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다만 2년 전 여당 대표가 ‘비문명적’이라고 비난했던 때의 시위, 그러니까 열차의 운행 지연을 야기했던 집단탑승은 시도도 못하고 있다. 장애인 차별의 현실은 심각하지만 시위 방식에는 공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바람대로 올 한 해 장애인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다. 국회의사당역 플랫폼에 가만히 앉아서 장애인의 권리를 외쳤을 뿐이다.

장애인들을 훈계했던 여당 대표가 자리에서 쫓겨난 일은 모두가 알지만, 장애인들의 지하철 행동이 너무나 ‘문명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로 전개된 나머지 현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애써 찾아와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설도 예년 수준을 찾아가고 있다. 서울시는 아예 2년 전으로 돌아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까지 폐지해 버렸다. 이제 출근길 아침 공기는 2년 전처럼 선선하고, 비장애 시민들은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외침을 구세군 종소리처럼 부담없이 듣고 지나친다. 장애인 차별의 평온한 일상이 돌아왔다.

‘욕을 먹는 게 낫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시민들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에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 모두가 공감해주겠죠. 그런데 그걸로 끝이에요. 뭐랄까, 지나가는 바람 같아요.” 귓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가 말한 “슬픔보다 무서운 무감각”에 대해서도 어림짐작이 된다.

시원한 바람이 충분히 불었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시간이 돌덩이처럼 굳어지자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슬슬 상황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본 모양이다. 며칠 전 서울교통공사는 출근길 행동에 나서는 장애인들에게는 지하철 역사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자회견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란을 이유로 쫓아냈고, 침묵 선전전을 벌이겠다고 하자, 시위라면 침묵조차 시끄럽다며 사람들을 끌어냈다.

지난주 금요일 나는 보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오랫동안 말을 빼앗겨온 사람들이 어떻게 침묵조차 빼앗기는지. 이날은 기독교, 불교, 원불교 성직자들이 혜화역에서 ‘우리는 함께 평등열차를 타겠다’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한 날이다. 장애인들은 그곳에서 침묵한 채로, 자신들이 탈 수 없는 열차의 문이 여닫히는 것을 보고 있을 예정이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자마자 서울교통공사 간부의 지시를 받은 지하철 보안관과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성직자들의 마이크를 빼앗았다. 곧이어 모두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졌다. 처음에는 소리를 낸 사람들이 끌려나갔고, 다음에는 침묵한 채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끌려나갔다. 지하철 플랫폼은 인산인해였는데 그 대부분은 보안관과 경찰관이었다. 거기서 울려 퍼진 가장 큰 소리는 서울교통공사 간부가 내지르는 고함이었다. 무를 뽑아내듯 한 사람씩 끌어내던 경찰관은 내게도 다가와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 나갈 거요, 여기 있을 거요?” 피켓도 없고 ‘이동권 보장’이라고 적힌 마스크도 쓰지 않은 비장애인. 뭔가 신경이 쓰였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다시 물었다. “혹시 시민이세요?”

생물종으로는 똑같은 인간인데 한쪽은 물건이고 다른 쪽은 시민이었다. 보안관과 경찰관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어김없이 간부의 고함이 들렸다. “들어가, 끌어내, 상관없어!” 탑승은커녕 목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앉아 있던 장애인들은 어느덧 아무렇게나 끄집어내도 ‘상관없는’ 돌멩이 같은 것이 되었다.

상관없는 사회, 관심 없는 사회, 돌봄 없는 사회라는 말이 잠시 내 머릿속을 스쳐갈 무렵, 서울교통공사의 간부는 장애인들이 퇴거 명령에 불응한다며 열차의 무정차를 무전으로 지시했다. 이제는 열차의 운행 방해가 장애인들이 아니라 서울교통공사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전장연의 시위로 인해 열차는 이번 역을 무정차 통과합니다. 승객들께서는…” 마치 ‘너희 혼 좀 나봐라’라는 식으로 비장애 시민들에게 일러바치고 있었다. 애초 열차에 탈 수도 없었고 탈 생각도 못했던 장애인들은 열차 무정차의 책임까지 뒤집어썼다. 그러고나서 20분쯤 지났을까. 장애인들이 모두 쫓겨난 역사 안에선, 내게 시민이냐고 공손히 물었던 경찰관처럼 친절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열차는 정상 운행합니다.” 장애인들을 내쫓고 정상 운행한다는 열차, 정상을 되찾은 나날들이, 나는 정말로 무섭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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