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정권심판론을 잠재우나

양권모 칼럼니스트
다수 야당의 견제 속에서도 ‘시행령 통치’로 폭주를 멈추지 않던 윤석열 정부다.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면 이 정권의 폭주를 제어할 방도가 없어진다. 퇴행적 국정기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게 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다수 야당의 견제 속에서도 ‘시행령 통치’로 폭주를 멈추지 않던 윤석열 정부다.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면 이 정권의 폭주를 제어할 방도가 없어진다. 퇴행적 국정기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게 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2대 총선이 한 달여 남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처지가 역전됐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질 수도 있다는 당혹,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선거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기대가 교차한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예상하기 힘들었던 지형이다.

그새 무슨 쟁기질이 있었나. 윤석열 대통령이 대오각성한 것도 아니고, 국민의힘이 딱히 잘한 것도 없다. 단 하나, ‘이재명 민주당’의 듣도 보도 못한 공천 막장극이 선거 지형을 객토시켰다. 총선 흐름에 무엇보다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공천이다.

한 달여 너무도 요란한 민주당의 공천 과정, 그 자멸적 풍경이 너무도 그로테스크하다. 시스템 공천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친명횡재, 비명횡사’라는 살벌한 조어가 맞춤이다. 친명은 살고, 비명 특히 이재명 대표의 잠재적 경쟁자는 가차 없이 쳐냈다. 공천 시스템은 친명에는 한없이 관대했고, 비명에는 한없이 가혹했다. 시스템 잣대가 고무줄일 경우 공정성은 길을 잃는다. “원칙 따라 공천”(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을 배척하는 질문은 많다. ‘박용진’을 ‘정봉주’로 바꾸는 것이 환골탈태인가. ‘임종석’을 컷오프하면서 ‘추미애’를 전략공천한 기준은 뭔가. 당 정체성을 들어 ‘홍영표’에겐 경선 기회조차 주지 않으면서 ‘이언주’를 전략경선에 올린 건 무슨 원칙인가. 경선 기회를 보장해준 올드보이(박지원·정동영)는 떡잎이 아닌 새순인가. 마땅한 답(答)이 없을 것이다. 죄다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사실 국민의힘 공천도 점수를 주기 어렵다. 현역 물갈이, 쇄신 강도는 역대 최하를 예약했다. ‘중진 불패’ 기조에 20·30대 공천은 희귀종이다. ‘늙은 정당’의 색깔이 우중충하다. 친윤에 대한 문책성 공천도 전무하다. 반성도 쇄신도 감동도 없는, 참으로 고요한 국민의힘 공천이 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당 공천 파동의 반사이익이다.

원래 집권 중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은 중간평가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지난 2년간 윤석열 정부 실정 목록은 너무나 완연하다. 내치와 외치, 국정 어느 분야에서도 성과를 내세우기 어려운 형편이다.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경제는 하락하고, 민생은 고단하고, 평화는 위태롭다. 정권 과제로 천명한 교육, 연금, 노동 개혁은 빈수레만 요란했다. 정권심판론이 비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려야 질 수 없는 상대가 윤석열 정권’이라는 인식이 민주당에 팽배했다. 적어도 민주당이 ‘공천 자해극’을 상영하기 전까지는 그럴 만했다.

민주당의 공천 분란이 윤석열 정부의 무도함을 덮어주고 있다. R&D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카이스트 학생을 ‘입틀막’하고, 김건희 여사의 호칭을 ‘김건희’라고 했다는 이유로 방송사를 제재하는 일이 문명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놓고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끝내 ‘김건희 특검법’을 폐기시켰는데 역풍이 별로 없다. 민주당의 공천 파동이 정권심판론의 불씨를 희석시킨 결과다.

자멸적 공천, 왜 이럴까. ‘무조건 이긴다’는 대책 없는 낙관론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 대표와 친명 지도부는 총선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긴다고 한다. 그러니 노골적으로 ‘이재명당’ 완성을 추구했을 터이다. 분열 앞에서 “입당도 자유, 탈당도 자유”라며 태연했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반감이 도저해 공천을 일단락하고 본선으로 넘어가면 정권심판론이 활활 타오를 것이라 확신하는 분위기다. 목련이 피면 친명만으로 짜인 국회 다수 의석 확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 대표와 친명 주류가 자기희생과 헌신 없이도 총선 때 저절로 정권심판론이 작동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보다 안이한 판단은 없다. 민주당의 공천 파동이 심각한 것은 정당의 핵심 자산인 신뢰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안세력으로서 제1야당과 그 대표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신뢰가 흔들리면 정권심판의 기치가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힐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정작 심판받아야 할 여권이 총선에서 이긴다면,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용인한 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다수 야당의 견제 속에서도 ‘시행령 통치’로 폭주를 멈추지 않던 윤석열 정부다.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면 이 정권의 폭주를 제어할 방도가 없어진다. 퇴행적 국정기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게 된다.

다시 묻는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헛발질로 윤석열 정권에 역주행의 무한대로를 열어준다면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텐가.

양권모 칼럼니스트

양권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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