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S에는 ‘깨알 글씨’라도 있었나

전병역 경제에디터

“노총각(중소기업)이 ‘롤렉스 시계(키코)가 있으면 색싯감(환위험 회피)이 생길 것’이라는 마을이장(은행)에게 속아 넘어갔다.”

어느덧 16년 전 일이다. 당시 중소기업 쪽을 담당하던 기자는 낯선 단어와 마주쳤다. 환위험 회피용 통화옵션상품 키코(KIKO). 위 비유는 환헤지피해공동대책위원회가 ‘옵션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소장에 적은 말이다. 2008년 사건을 다시 꺼낸 이유는 키코가 국내 금융 역사에서 파생상품 위험을 사실상 처음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 NH농협은행 본점 앞. 홍콩특별행정구를 상징하는 ‘양자형기’가 새겨진 깃발이 등장했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 손실을 성토하는 피해자들 모임이다. ELS에 앞서 우리는 홍콩H지수부터 볼 필요가 있다. 이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한 텐센트, 알리바바, BYD, 중국건설은행 등 대표 50개 종목을 묶어 산출한 것으로, 중국 경제 상황을 상징하는 수치다.

ELS 상품은 2021~2023년 집중 판매됐는데, 이 시기 홍콩H지수 즉 중국 기업들의 형편이 어찌했는지는 가히 추측할 만하다. 12000을 넘던 지수가 지금은 5800대까지 추락했다. 앞서 홍콩H지수는 2015년 고점을 찍고 이듬해 약 50% 폭락한 전례도 있다. 이런 사실을 고객에게 제대로 알렸을까. 아니 판매창구 직원은 알고나 있었을까.

이번 사태는 사실 예견된 사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년 전 외국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증권(DLF·DLS) 사태의 판박이다. 기본 구조는 과거 키코를 닮았다. 즉 일정한 조건이 되면 손실은 무한대로 커져버리고, 혜택은 유한한 구조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계약 시점엔 좋은 점만 보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확증편향의 함정’이다.

또 판매처 중에선 은행이 특히 논란거리다. 은행이란 어떤 곳인가. 낮은 이자율이라도 믿고 맡기는 곳이다. 심지어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에도 은행에 예금을 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이런 은행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며 ELS 가입을 적극 권유했다니 70대 노인 같은 이들이 혹하지 않을 방도가 있겠나.

앞서 금융당국은 2019년 DLF 사태 때 은행은 원금 손실률이 20%를 넘을 수 있는 고난도(고위험) 상품을 팔지 못하게 하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1개월 만에 판매 허용으로 돌아섰다. 현재 벌어진 손실률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금융감독원의 자체 조사로는 한계가 있다. 은행의 입김이 작용한 것인지, 감사원이 즉각 공익감사에 나서야 한다.

이런 파생상품은 극단화된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돌연변이이자, 어쩌면 ‘귀태’이다. 2008년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은 금융위기의 뿌리 또한 금융공학이 만들어낸 파생상품이었다. 파생금융상품을 아예 팔지 못하게 하기 어렵다면 어떤 조건에서, 누가, 어떤 이에게, 어떻게 팔 것인지, 이참에 기준안을 마련토록 해야 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ELS를 충분히 보상하면 금융회사 제재를 경감하겠다”고 했다. 안일한 태도다. 보상과 제재는 별개로 가야 한다. 그래야 외양간이라도 고쳐서 ‘제2, 제3의 소’를 잃지 않는다.

파생상품을 팔 때는 최소한 ‘깨알 글씨’라도 위험거리를 적어두고, 정확히 알려야 한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제22조에 투자성 상품은 ‘손실보전 또는 이익보장이 되는 것으로 오인하게 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물론 투자의 기본 원칙은 자기책임성이다. 마을이장의 말이라도 우선 걸러 들어야 하고, 선택은 결국 본인 몫인 게 맞다. 부동산 분양을 받다보면, 미처 간과했던 쓰레기소각장이나 축사, 묘지 등이 집 근처에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분양 안내책자 끄트머리에는 늘 깨알보다 작은 글씨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적시해둔다. 수억원짜리 집을 사면서 일명 ‘임장’도 한번 하지 않는 건 사실 문제다.

불완전판매의 주체가 현장 창구 직원만일 순 없다. 금융사들은 관련 임직원들의 책임을 묻길 바란다. 금융위나 금감원 또한 마찬가지다. 정책실명제에 따라 ELS 관련 정책 담당자들의 이름을 공개하고, 수장 이하 핵심 책임선상의 담당자는 책임져야 한다.

외환위기 사태 이후 금융위(금감위)와 금감원으로 분리된 체제가 근본 원인은 아닌지도 들여다보자. 특히 ‘반민간기구’인 금감원은 은행, 증권 같은 금융사들이 내는 감독분담금 등으로 운영되는 맹점이 있다.

반복되는 금융사고와 감독 부실을 보건대, 감독권을 ‘공공의 통제’ 아래로 오롯이 되돌리는 게 낫다. 22대 국회에선 반드시 무슨 수를 써야 할 판이다.

전병역 경제에디터

전병역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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