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차비소’ ‘지기비소’를 권함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

어느 선거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투표하러 갔는데, 막상 투표소에 들어가서도 찍고 싶은 후보가 없었다. 그래서 투표용지를 백지상태로 투표함에 넣고 나왔다. 그날 저녁에 최악의 후보가 당선됐다는 개표방송을 볼 때까지도 그렇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정작 후회가 시작된 것은 시간이 좀 흐른 뒤였다. 세상이 더 나빠지고, 그렇게 나빠진 세상이 사람들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투표를 할 때 갈등이 생기는 경우는 계속 있었다. 늘 투표장에는 갔지만, 여러 장의 투표를 하는 선거에서 일부 투표용지는 백지로 넣기도 했다.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늘 분명하게 있는 유권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한 번쯤은 해 보지 않았을까?

정치권에서는 이번 4·10 총선의 투표율이 어느 정도 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러나 많은 선거에서 그랬듯이 투표장에 가지 않는 유권자들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총선 결과를 보더라도, 투표장에 가지 않는 유권자 숫자가 제1당에 투표한 유권자 숫자를 넘어섰던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높은 66.2%의 투표율을 기록했던 2020년 총선에서도 투표장에 가지 않은 유권자 숫자는 1486만7851명에 달했다. 이 숫자는 선거에서 승리했던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총 득표 숫자인 1434만5425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물론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투표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투표장에 갈 것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무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도 있다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훨씬 더 바람직한 것은 투표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하는 정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즉 유권자들이 찍고 싶은 후보와 정당이 많아지고, ‘투표를 하면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투표합시다’라는 캠페인을 하지 않아도 유권자들의 발걸음이 투표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투표장에 가지 않는 유권자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만도 아니다. 투표를 하러 갈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는 유권자도 있을 수 있고,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현하고 싶은 유권자도 있을 수 있다. 진영 간 싸움을 보는 것에 지친 유권자도 있을 수 있고, 투표해 봐야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유권자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유권자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용지는 2장이다. 지역구 후보에게 1표, 정당에 1표를 행사하게 되어 있다. 이런 1인 2표 방식도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지역구 후보에게 1표를 행사하는 것만 가능했다. 지역구 투표 결과를 합산해서 비례대표 의석까지 배분했던 것이다. 그런 방식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사람들이 있었고 2001년 7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그래서 2004년 총선부터 1인 2표제로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된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받아보는 2장의 투표용지 중 ‘지역구 후보 투표용지’에는 제한된 선택지만 있을 것이다. 후보로 나온 사람이 거대양당 소속 후보 2명뿐인 지역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 비례대표 투표용지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 정당들의 정책 중에는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도 있을 수 있다. 내 처지나 생각을 대변하는 정책이 있을 수도 있고, 내 가족이나 친구·이웃의 문제를 다룬 정책이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 당장 그 정당 혼자서 정책을 실현하기 어렵더라도, 관심을 표명하는 유권자들이 많으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투표장에 가서 ‘지차비소’ 또는 ‘지기비소’라는 방식으로라도 투표하기를 권하고 싶다. 지역구는 차선 또는 차악에 투표하고, 정당 비례대표 투표는 소신투표를 하는 방안이 ‘지차비소’이다. 도저히 지역구에 찍을 후보가 없다면 지역구는 기권하고 정당 비례대표 투표만 하는 ‘지기비소’의 방법도 있다.

투표를 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세상이지만,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바뀔 가능성조차 없다.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를 바라지는 못하더라도, 내 삶을 더 힘들게 할 정치는 피해야 한다. 그리고 2장의 투표용지 중에서 정당 비례대표 투표용지에서 실낱같은 변화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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